<분수대>私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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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지난(至難)했던 시절「목구멍이 포도청」인농민들은 비싼 이자를 감수하고 곡식이나 돈을 빌려야 했다.보통전리(錢利)꾼으로 불리던 시장 대금업자들과 가난한 농민들과의 거래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그러나 언제나 아쉬운 사람이 당하게 마련이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치 못해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일도 흔히 벌어졌다.
현물(現物)을 빌려주고 현물로 갚는 「색갈이」또는 장리곡(長利穀)은 춘궁기(春窮期)에 빌려 수확기에 1.5배로 갚는 것이기본이었다.현금으로 빌려준 뒤 작물(作物)에 대해 구입권을 갖는,요즘의 밭떼기와 비슷한 「싸리돈」이란 방식도 있었다.현금을빌려주고 현금으로 받는 사금융(私金融)은 변리(邊利),즉 이자의 종류나 지불방식이 대단히 다양했다.조선시대 관아(官衙)에서법으로 정한 이자인 관변(官邊)은 연간 1할이고 이를 넘겨 받으면 장형(杖刑)에 처하도록 했 지만 개인간에 이뤄지는 거래에이런 법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장에서 통용되던 장(場)이자,즉 장변(場邊)은 대체로 본전,즉 원금의 10%를 선이자(先利子)로 뗀 뒤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에 본전의 10%씩 갚아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결국50일에 1할이란 비싼 이자를 무는 셈이다.
체계(遞計)돈이라는 것도 있었다.예컨대 본전이 1백원이라면 이자 10원을 합한 1백10원에 대해 장날마다 11원씩 열번에나눠 갚도록 하는 방식이다.본전은 남기고 이자만 받는 것은 누운변,한자로는 와변(臥邊)또는 장변(長邊)이라 했고,이자를 나눠 낼 때 이율을 점차로 줄여 받는 것을 낙변(落邊),거꾸로 늘려 받는 것은 가변(加邊)이라 했다.
다른 사람의 돈을 장기간 빌린 다음 이를 단기고리(短期高利)로 놓아 이자 차액을 남기는 간변(間邊)처럼 요즘의 전문 사채업과 유사한 형태도 있었다.세도가(勢道家)나 여각(旅閣)같은 대상인이 전주(錢主)가 됐다.
최근 우리나라의 사채자금 규모가 거의 8조4천억원,총통화의 6.3%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다.私금융이 존재할 틈새야 늘 있는 법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 비중이 너무 크다.
떳떳지 못한 재산,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제도금융이 어우 러진 결과겠다.그 속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서민과 영세기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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