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어린이책] 흑인 노예 후안, 네게 화가가 될 자유를 주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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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나, 후안 데 파레하
엘리자베스 보튼 데 트레비뇨 지음
김우창 옮김,
다른,
280쪽, 1만1000원

17세기는 유럽 역사의 분수령이다. 합리주의와 인간 중심의 새로운 이념이 싹트고, 과학과 산업이 융성하기 시작한 데다, 부르주아들이 권력과 예술 활동의 핵심으로 떠오른 시기다. 한마디로 대변혁기다. 잠시 눈을 감고 타임머신에 몸을 실어 17세기 유럽으로 떠나보자.

이름만 들어도 ‘와~’하는 예술가·철학자가 보인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작품을 쓰고 있고,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삶의 의미를 고민 중이다. 네덜란드에선 렘브란트와 루벤스가 화폭에 이미지를 담고 있고, 프랑스에선 코르네유와 라신, 몰리에르가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미술비평가 열 명 중 아홉 명이 최고 작가의 하나로 꼽는다는 명화 ‘궁정의 시녀들’을 그린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도 그 시기에 활동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고, 그 옆에서 물감과 붓을 건네는 흑인 노예 ‘후안 데 파레하’이다. 이제 그의 기막힌 예술적 운명을 들어보자.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뒤 스페인 땅에는 노예제도가 자리 잡았다. 후안의 검은 손은 백인 주인이 그림을 편하게 그릴 수 있도록 물감을 준비하고 캔버스를 펼쳐 놓는 데 쓰일 뿐이었다. 대상을 뚫어져라 관찰한 뒤 맹렬하게 시작하는 데생 작업, 화실을 압도하는 침묵 속에서 신들린 듯 이어지는 붓 터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타오르는 예술적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저도 그림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는 노예 신분을 잊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스페인에는 노예가 예술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단다. 손으로 세공품 같은 것을 만드는 장인이 되는 건 괜찮아. 하지만, 예술은 안 된단다.”

궁정 화가인 주인을 따라 이탈리아로 함께 떠난 여행에서 그는 몰래 캔버스와 목탄을 꺼내 그림을 그려보지만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끔찍하게도, 그 짓을 몰래 계속하려 했다.(…) 나는 두 가지의 격렬한 감정을 마음속에서 도저히 화합시킬 수 없었다.“

완성된 소묘를 불태우고 그림을 구석에 숨기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후안은 어느덧 세계 제일의 스승 곁에서 배운 뛰어난 예술가의 경지에 이른다. 숨막힐 듯 계속되던 비밀 작업이 마침내 국왕 앞에서 들통 나던 그날. 그러나 주인 벨라스케스는 화가로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훌륭했다.

“나는 오늘로 후안 데 파레하에게 자유를 주고, 내 조수로 임명하여 보수와 의무를 줄 것을 약속한다.”

후안은 벨라스케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도우며 자신의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이 책을 번역한 인문학의 거장 김우창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가 강조했듯, 두 사람은 이렇게 웅변한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서로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벨라스케스는 후안의 초상화를 딱 한 점 남겼다. 대담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의 이 그림은 1970년 한 경매에서 당시 최고가인 약 550억원에 낙찰됐다. 후안이 다시 살아나 이 소식을 듣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파격적으로 신분을 초월했던 두 예술가는 ‘예술적 동지’로 영원히 남았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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