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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에 대처하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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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러시아의 대제(大帝) 예카테리나 2세는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 침실의 역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평생 그녀는 몇 명의 정부(情夫)를 거느렸던 것일까. 미국 대학생들에게 물었다. 정확한 숫자는 필요없고, 다만 몇 명에서 몇 명까지 범위를 말해보라고 했다. 인간의 수명과 물리적 한계를 감안할 때 틀리기 힘든 문제였는데도 오답률이 45%나 됐다.

왜일까. 정확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란다. 월스트리트의 잘나가는 헤지펀드 매니저에서 대학교수 겸 저술가로 변신한 미국인 나심 니컬러스 탈렙 박사의 설명이다. 최소치를 0으로 하고, 최대치를 넉넉하게-예컨대 1000 이상-늘려 잡았다면 누구나 맞힐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정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리적 강박 탓에 틀린 학생이 많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출간돼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검은 백조(Black Swan)』의 저자인 탈렙은 시계수리공이나 신경외과 의사에게는 정확성이 필수적인 자질이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과거의 경험과 사례, 통계에 기초한 미래 예측이 예기치 못한 엉뚱한 일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큰 사건일수록 대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란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백조는 당연히 흰 새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17세기 호주로 건너간 영국인들이 생김새는 영락없는 백조지만 색깔은 검은 새를 발견하면서 ‘백조는 희다’는 통념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백조는 흰색이란 전제에 바탕을 둔 모든 명제 또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고도의 수학적 기법과 수퍼 컴퓨터를 동원해 아무리 정교한 시뮬레이션 모델을 돌려본들 예측 범위에서 벗어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란 게 ‘검은 백조’의 교훈이다. 역사와 수학, 과학에 대한 지식을 무기로 미래를 예단하고 대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지적 오만이거나 허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탈렙은 충고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 예측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다. 기업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다. 정확한 예측이 최적의 처방을 가능케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예지를 비웃는 검은 백조가 수시로 출현하는 것이 현실이다. 21세기의 흐름을 바꿔놓은 9·11 테러가 그렇고,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그렇다. 검색 엔진 구글의 성공 또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검은 백조다. 인간은 그럴 만한 요인이 누적된 결과라고 설명하지만 예측의 실패를 모면해 보려는 사후적 합리화일 뿐이다.

대통령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뛰고 있다. 하지만 왠지 허전하고 답답한 느낌이다. 왜일까. 지나치게 정확성을 추구하기 때문 아닐까. 투입과 산출, 비용과 수익이라는 정확한 계산에 따라 회사를 경영하는 것과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다르다. 디테일에 매달리다 보면 컨텍스트를 놓치기 쉽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이치다. 작게 보면 틀려도 크게 보면 맞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국정(國政) 아닐까.

불확실성을 다루는 것이 대통령의 기본 소임이다. 작은 일에서 큰 일까지 모두 정확해야 한다는 강박증은 불시에 찾아오는 검은 백조에 대한 대응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검은 백조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날아올지 모른다.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고 했다. 군자에게 필요한 유연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의 그릇은 보통 사람의 그릇과는 엄연히 달라야 한다. 작은 것을 담자고 큰 그릇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한 발 뒤로 물러선 듯한 여유 속에 어떤 검은 백조의 출현에도 겁먹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대통령을 기대해 본다. 예카테리나 2세의 애인은 12명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배명복 논설위원·순회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