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를가다>2.코카서스의 中東 아제르바이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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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공산주의의 서슬이 아직 시퍼렇던 91년8월.카프카스의 심장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이 일어났다.자원민족주의를 주창하고 나선 인구 3백40만명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뒤이어 석유국 타타르스탄과 북극해의 코미가 석유주권을 선언하고 나섰다.그 파장은 실로 컸다.
한달후 아제르바이잔을 찾은 첫 손님은 마거릿 대처 前영국총리였다.영국 석유공사 대표단을 인솔하고 바쿠에 내린 대처前총리의첫마디는 70년간 단절된「석유외교의 재개」였다.
「불의 나라」아제르바이잔.석유가 많아 페르시아인들은 이 땅을그렇게 이름지었다.금세기초 세계석유의 절반을 공급하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는 세계 굴지의 석유재벌이 몰려든 국제도시였다.2차대전때 옛소련의 젖줄인 바쿠를 히틀러가 장악하려하 자 연합군은바쿠를 불바다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70년대 걸프의 참사를 면한채 옛소련의 자원식민지로 존속했다.소련이 붕괴된 오늘 바쿠는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바쿠 시내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해안을 따라 새로이 건설되는 초호화급 호텔이다.군데군데 즐비한 환전소나 서구식 식당도 다른 중앙아시아국가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길에는 바나나등수입과일상과 아이스크림가게가 지나는 행인의 발을 붙 든다.
94년9월 아제르바이잔은 80억달러 상당의 「세기의 계약」을체결했다.80억배럴의 원유매장량이 추정되는 카스피해저 개발계획에 영국석유공사를 비롯한 서방 7개 회사가 참여한 것이다.이 계획이 추진될 경우 아제르바이잔은 1백년간 전세 계를 지탱할 석유강국이 된다.『아제르바이잔은 21세기의 중동입니다』고 말하는 알리크 멜릭(64)바쿠시장의 얼굴에는 중동사람들에게서 볼수있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의 미래가 장미빛만은 아니다.지난 5월28일 독립3주년을 맞은 바쿠는 다소 침울한 분위기였다.지난 6년간 혼신을 다해 싸운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이 아제르바이잔의 일방적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88년6월 아르메니아인이 대부분인 나고르노-카라바흐州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포함으로써 양국간 전쟁으로 비화된유혈투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은 국토의 20%를 잃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전쟁은 옛소련 붕괴후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충돌이었다.러시아가 기독교국인 아르메니아를,터키가이슬람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고 나서 종교간 대립이 첨예화된「카프카스의 보스니아전」으로 발전됐다.결과는 역 시 기독교권의 승리였고 이는 카프카스의 다른 이슬람민족들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체첸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아제르바이잔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쿠大의 역사교수 유수푸 유수만은 힘주어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은 다른 카프카스 민족과 같이 민족주의가 강하다.이런 이유로 같은 민족인 터키에 대한 친근감이 크다.최근 터키는 문자통합을 통한 민족통합을 시도,아제르바이잔의 라틴화를돕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국민성은 실용적이다.바쿠의 식당주인 누르시르 누라는 아제르바이잔은 선천적인 상업 민족이라고 했다.모스크바와 식료품.술.의류등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 바쿠는 다른 옛소련 도시에 비해 먹고 입을 것이 풍부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은 낯선손님을 만나면 집에 초대하고 난후 통성명을 한다』는 말이 있다.6년간 전쟁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1백달러 미만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를 초대한 아제르바이잔가정은 양고기.포도주등 푸짐한 음식을 대접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최대과제는 러시아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것이다.
멜릭 바쿠시장은 바쿠의 석유가 현재 계획중인 그루지야.터키를 거쳐 지중해로 나가는 송유관을 통해 수출될때 아제르바이잔은 진정한 독립국으로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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