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VS 영화] 빅 피쉬 VS 인생은 아름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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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주부 김민주씨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살아계실 때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부모라면 으레 자식을 사랑한다는데 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을까. 나만 유독 운이 없어 유별난 아버지를 만난 게 아닐까 생각도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아버지의 거짓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와선 잠든 자녀들을 깨워 주루룩 앉혀놓곤 "옛날엔 말이야…"로 시작되는 일장 연설을 하곤 했다. 그 말씀대로라면 아버지는 할머니의 태몽을 통해 하늘에서 여의주를 물고 내려온 용의 현현이거나 북두칠성에서 지구로 온 어린왕자였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백곰띠임을 주장하며 비범한 탄생을 주장하던 아버지는 세살 때 이미 천자문을 읽기 시작한 신동이었으며 학창시절엔 시를 쓰는 문학청년이면서도 일등을 놓치지 않아 여고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으며 대학 땐 국내 최초로 럭비부를 창단했고 졸업 후엔 주먹으로 충무로를 휘어잡은 장사였다. 한국전쟁 때 변소 밑에 들어가 숨어 빨갱이들의 총부리를 피했다는 이야기는 하도 들어 상상 속의 냄새만으로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나 결론은 뻔했다. 이런 훌륭한 아버지의 자식들인 우리는 어딜 가나 최고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보다 얼마나 더 편하고 좋아진 세상에서 뭐가 힘들어 일등을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어린아이였을 때 그 말씀에 아버지를 영웅으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조금 커버린 이후엔 그건 그냥 자식들을 닦달하기 위한 허풍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한번도 따뜻하게 안겨보지 못한 김씨는 "다 이게 너희들을 사랑해서"라고 핑계대면서 늘 술집을 드나들며 여자들이랑 어울릴 아버지의 도덕성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10년 전 아버지가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도 김씨는 자식으로서의 의례적인 슬픔 외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립다거나 그 허풍이 새삼스럽게 다시 듣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꿈속에서 아버지는 무슨 말씀인지 하러 나타나셨다가는 사라지곤 했을 뿐.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김씨도 자식을 키우면서는 아버지와 자녀들 간의 뭉클한 애정을 그린 영화들만 보면 눈물이 났다. 특히 몇년 전에 본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는 김씨를 펑펑 울게 만든 영화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유대인으로 아들과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 행을 눈앞에 둔 아버지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아들에게 "이건 게임이야. 숨바꼭질 게임. 먼저 1000점을 얻는 사람에게 진짜 탱크를 주는"이라는 거짓말은 아름다웠다. 비록 아무런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곤 하지만 진지하게 수용소 안에서 아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침묵게임을 하며 죽음의 공포를 버티도록 하는 아버지의 거짓말은 눈물겨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고난 뒤 숨어 있던 아들이 아버지의 말대로 진짜로 탱크를 탄 연합군을 만나 거짓이 현실로 완성되는 순간의 감동은 대단했다.

'거짓말이 저렇게 위대할 수 있구나. 거짓말이 절망으로 가득한 슬픈 현실을 완전히 새로운 희망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김씨는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의 거짓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물은 '내 아버지의 거짓말도 저것처럼 나를 위한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전 김씨는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보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김씨처럼 아버지의 평생 동안의 허풍이 지겨워서 말도 안하고 지내는 사람이었다. 저 심정 내가 잘 알지. 병원에서 세상을 놀라게 하며 태어난 아버지가 유난한 성장통을 겪은 뒤에 마녀의 눈에서 자신의 최후를 본 뒤 세상 곳곳을 누비며 거인과 샴쌍둥이와 늑대인간을 만나는 모험 이야기라니. 내 아버지의 허풍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 역시 아버지들이란. 김씨는 자신의 아버지만이 세상에서 가장 큰 허풍쟁이라는 생각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김씨는 아버지의 거짓말 속의 참모습을 그토록 알고 싶어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친구에게 자신이 태어난 날의 진실을 듣는 장면에서 뭔가 찡한 걸 느낀다. "너의 아버지는 세일즈 일로 바빠서 병원에 올 수 없었지. 왔더라도 분만실에는 못 들어 왔을 거고." 아들이 들었던 아버지의 버전으론 "아버지는 네가 태어난 날 강물 속에서 누구도 잡을 수 없던 커다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단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결혼반지를 미끼로 던져서 말이야"였던 그 거짓말의 진실은 초라했다. 그래, '아버지의 거짓말'의 힘이란 저런 것이구나. 그저 흑백의 칙칙한 일상의 '사실'들을 화려한 색깔과 무늬의 '전설'로 엮어내는 것. 그렇게 엮어진 이야기로 자식들이 평생 꿈을 가지며 살아갈 힘을 주는 것.

주인공의 아들이 마지막 죽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입으로 "아버지는 큰 물고기가 되어 강으로 돌아가게 되죠"라며 최후의 거짓말을 대신 완성해주는 장면에서 김씨는 정말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저렇게 아버지의 거짓말과 화해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의 거짓말을 아름다운 한편의 신화로 내가 이어갈 수도 있었는데.

김씨는 꿈속에서라도 다시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화해의 시간도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 그 거짓말들 속에서 나에게 주려 하셨던 사랑을 이제 기억하렵니다. 그건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특별했던 자녀들에게 누구보다도 특별했던 분이 되어주고 싶었던 그 마음이었겠죠. 이젠 당신의 거짓말을 아름다운 옛 이야기로 간직하겠습니다. 당신의 바람대로 그 이야기들은 마음 속에 살아남아 영원히 전해질 겁니다. 나의 자녀들로, 또 그 자녀의 자녀로.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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