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시시각각

한국 경제의 봄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2008년 봄 우리 경제의 모습이 꼭 그 꼴이다. 경제가 봄기운처럼 일어나리라던 기대는 오간 데 없고 오히려 불안감이 엄습한다. 주가는 하염없이 떨어지고, 환율은 정신없이 오른다. 원유에서 철광석·비철금속까지 원자재 값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오르고, 옥수수·콩·밀 등 곡물가격도 이에 질세라 가파르게 값이 뛴다. 이 바람에 붕어빵·라면·칼국수 값이 덩달아 오르고, 중소 부품 하청업체들은 납품가를 올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이 판에 봄이 봄처럼 보이겠는가.

경제를 반드시 살리겠다며 출범한 새 정부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을 터이다. 뭘 해볼 틈도 없이 온갖 악재가 한꺼번에 밀어닥쳤으니 말이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시장 바닥으로 공사 현장으로 열심히 뛰어다녀 보지만 그저 해보겠다는 의욕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사실 뾰족하게 내놓을 대책도 없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에서 비롯된 금융경색은 우리 정부가 손써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막을 수도 없다. 유가와 원자재 값·곡물 값 역시 그저 오름세가 꺾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손을 놓고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가 애는 써 보겠지만 솔직히 당분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규제를 풀고 세금을 깎아 투자를 늘린다지만 그 효과는 1∼2년 후에나 나타난다. 당장 금리나 환율에 손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겠지만 생각만큼 약발이 들을 것 같지 않다. 자칫하면 엉뚱한 부작용만 불러올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제 먹고살기도 힘겨운 영세상인과 중소기업들더러 경제 살리기에 나서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대기업뿐이다. 대기업이 나서야 한다. 왜냐고? 대기업이 아니고는 누구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나마 버티고 일어설 힘을 가진 게 대기업이다. 정부가 세금 깎아주고 규제를 풀면 투자를 늘리겠다고 약속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건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소리다. 모두가 힘겨워할 때 솔선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라. 그러면 반기업 정서니 반재벌 감정이니 하는 얘기도 쏙 들어갈 것이다.

당장 대기업에 주물제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의 딱한 사정을 한번 들어보라. 원자재 값 급등의 직격탄을 맞은 이들은 납품가를 올리려 해도 대기업의 위세에 눌려 입도 뻥끗 못했다. 견디다 못한 이들이 대기업에 대한 납품을 중단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에서다. 경기가 나빠지면 대기업들은 원가를 절감한다며 으레 납품가를 깎았다. 이게 우리 대기업·중소기업 관계의 현주소다. 그런 식의 원가절감을 어디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머물면 중소기업은 무너지고 대기업도 경쟁력을 잃는다.

경제가 어려우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다 어렵다. 그 어려움을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대신 대기업 스스로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원가 부담을 흡수하면서 하청기업들을 보듬어 보라. 대기업의 자기 희생 없이 대통령 앞에서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대기업·중소기업 상생(相生)을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기업에도 필요하다.

한때 회장감이 없을 정도로 눌려 지내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친기업’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와 함께 드디어 때를 만났다. 정경유착의 기회를 다시 잡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대기업이 앞장서 나라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잡았다는 뜻이다. 정부가 못하는 일을 대기업들은 할 수 있다. 이즈음 전경련이 대기업들의 중지를 끌어 모아 경제회생의 액션플랜을 내놓으면 어떨까.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