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北美경수로회담-北입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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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정일(金正日)은 핵보다 쌀이 더 급했다.」 북한이 8일 北-美준고위급 회담에서 사실상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수용한 1차적 요인은 북한의 긴박한 식량 사정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한마디로 김정일은 체면이 크게 구기지만 않는다면 핵문제를 다소 양보하고,쌀을 얻어내자고 계산한 것이다.이는 뒤집어 보면 북한 식량 사정이 이제「문제」차원을 넘어서 정권 자체를 위협할정도로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얘기도 된다.북한의 연간 곡물 수요량은 6백10만~6백50만t이다.반면 실제 생산량은 89년이래 3백80만~4백8 0만t 수준에 불과했다.줄잡아 매년 2백만t이 부족했고 북한당국은 중국등의 원조와 주민들의 절량(絶量)운동,즉 한끼굶기 운동으로 근근이 어려움을 넘겨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이른 것이다.금년의 경우 지금까지 실제인도된 물량은 미국이 연초에 제공한 곡물 5만4천t뿐이다.그결과 좀 낫다는 평양조차도 최근 배급이 몇달간 중단,인민반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연명할 식량을 조금씩 나눠주는 형편이다.
더욱이 금년은 식량문제가 김정일의 권력승계 스케줄과도 맞물려있다.김정일은 김일성(金日成)사망 1주기(7.8)또는 정권 창건일(9.9)등을 계기로「등극」하려했을 공산이 크다.따라서 김정일은 지금 北-美연락사무소 개설.외국 자본 유 치.식량난 해결같은 주민위무용 정치적 무대 장치가 필요하다.하지만 현 상황은 김정일에게 답답하게 돌아가고 있다.식량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는「先경수로 後지원」이라는 틀에 묶여있어 지지부진한 상태다.만일 이같은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경우 자칫 식량폭동 같은사태가 발생,그의 권력 승계 자체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체제안정이라는 장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중심적 역할이라는 명분을 어느 정도 양보하고라도 對美관계개선을 이루는 것이 절박하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물론 이같은 태도 변화를 북한의 본질적인 변화로 보기는 어렵다.북한연구소의 고태우(高太宇)부장 같은 전문가들은『북한이 발등의 불을 끄려고 다소 융통성을 보인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그러나 북한은 이미 제2,제3의 노림수를 마련해놨 을 것』이라며 차분한 대응을 강조했다.
〈崔源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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