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20. 청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좌가 싫으니까 우쪽을 보는 사람, 우가 싫으니까 좌쪽을 보는 사람, 서서히 갈라지는가 했더니,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좌는 소련이 제시한 신탁 통치를 지지하고, 우는 무슨 소리냐, 우리가 또다시 누구의 지배하에 살아야 되느냐, 연일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1948년 5.10 총선을 거쳐 8월 15일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앉았다. 북은 북대로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김일성(金日成)이 클로즈업 됐다. 진리와 정의만을 따지던 우리는 망연히 바라보며 어지러워졌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예과를 거쳐 정통으로 신제(新制) 서울대에 올라온 우리는, 낯선 얼굴들과 마주치자 불쾌해졌다. 어디서, 어떻게 해서 들어온 사람들인가.

아르바이트가 유행했다. 먹고 살아야 된다. 중.고교 선생이 가장 무난했다. 예과 마지막 부장을 하시던 김종무(金鍾武) 선생이 경기중.고 교장이 되셨는데, 천관우가 거기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정신의 중심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누구한테 뭘 가르친단 말이냐.

미군 통역으로 많이 나갔다. 가정교사라는 게 가장 안전한 자리이나 인연이 없으면 만나지 못한다.

예과 동기인 이진섭(李眞燮)이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인기를 한몸에 모았다. 박광필(朴光弼)도 아나운서로 들어갔다. 그가 나한테 시험을 보라고 했다. 정동 스튜디오에서 밤을 새우며 단편소설 '날아간 새'를 써냈다. 안서(岸曙) 김억(金億) 선생과 송영호(宋永浩) 문예과장이 심사했다. 합격이라고 했다. 나가보니 김희창(金熙昌).이익(李翼.별명 金火浪).최요안(崔要安).유호(兪湖).김영수(金永壽)씨 등 면면이 휘황찬란하다. 사흘 만에 나는 宋과장에게 사표를 내밀었다. 그는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매우 건방지군. 아무나 뽑아 주는 자리가 아닌데, 도도한 철학을 가졌나? 뭐야 그게?"

"분위기가 저하고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느꼈습니다. 전 방송이라는 것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봐 韓군. 자네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을 가졌다고 하자. 누구한테 전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여긴 보통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살자, 저렇게 삽시다 권유하고 이야기하는 고장이야. 그것을 쉽게 전달하는 기술을 필요로 해. 대학 교수가 들으면 아!저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서울역 뒤쪽에서 일하는 지게꾼들도 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어렵게 철학적으로 표현할 필요 없어. 알기 쉽게 보통으로, 만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기술, 그것이 당신 밑천이 될 거야. 당신 눈동자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야!"

나는 사직원을 도로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방송에 투신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운사 작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