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검정시험’ 보는 일본 아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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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6일 도쿄 시부야구 고쿠가쿠인(國學院)대 강의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400여 명의 응시자가 일제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날 이들이 치른 시험은 이름도 생경한 ‘아버지 육아능력검정’(이하 파파 검정). 도쿄와 오사카·나고야·히로시마·니가타 등 전국 7개 도시에서 치러진 제1회 검정시험에 모두 1030여 명이 응시했다. 민간단체 ‘파더링 재팬’이 주최한 파파 검정의 응시자 절반 이상이 어린 자녀를 둔 30대 아버지다. 그러나 손자를 돌보고 있다는 50~70대 할아버지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6월 말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오카와 아쓰지(大川敦司·31)는 “최소한 외출한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먹이고 옷을 입힐 수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시험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이날 시험은 갓난아이부터 만 6세까지 자녀를 키우는 데 알아야 할 육아상식 50개 문항으로 구성됐다. 신생아 예방접종 방법, 유아식을 만들 때 피해야 할 재료, 아이들이 즐겨보는 만화영화 등장인물, 동요 등 다양하다. 응시자에게는 성적에 따라 ▶수퍼 파파 ▶나이스 파파 ▶챌린지 파파 ▶위기 파파 등 단계별 인증서가 주어진다. 경제산업성과 도쿄도가 후원하는 이번 검정을 앞두고 대형 서점에는 지난해부터 ‘파파 검정 문제집’이 진열됐다. ‘파더링 재팬’의 안도 데쓰야(安藤哲也) 대표는 “과거 기업과 조직을 중시하고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겨 왔던 남성들이 육아의 즐거움을 깨닫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파파 검정은 언뜻 아버지들의 자발적인 움직임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고립된 아버지들의 생존을 위한 도전이자 변화하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다. 일본의 30~40대 남성들은 경제성장기에 직장에만 헌신하던 아버지들이 은퇴 후 가족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동시에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아버지가 육아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과거 학습 참관이나 학부모 모임이 어머니들의 모임이었다면 최근에는 아버지 참석자들이 20~30%에 달한다.

취업정보회사 디스코가 지난해 대학생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결혼 후에도 육아와 가정생활을 병행하기 위해 전문직보다 전근이나 야근이 적은 일반직을 원한다”는 남학생 비율이 10%를 넘어섰다. 아버지들의 육아 참여가 늘어나자 히타치제작소는 자녀 출산 시 아버지 사원에게 5일간의 유급 출산휴가를, 초등학교 4학년 미만의 자녀를 둔 사람에게는 단축근무제도를 각각 시행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도 지난해부터 어린 자녀를 둔 아버지 사원에 대해선 업종에 따라 단축근무나 재택근무 제도를 도입했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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