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가 즐긴 최후의 만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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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호 35면

하얀 바탕 위에 그려진 역동적인 멧돼지의 모습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레드와인(Super-Tuscan) ‘치냘레(Cignale·야생 멧돼지)’의 레이블이다. 이 와인 레이블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그 시작은 포도와 멧돼지의 악연(?)에서 비롯된다.

와인 레이블 이야기 <3>

우선 이 그림의 주인공인 멧돼지가 출연한 곳은 이탈리아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그레베 마을 근처다. 뒤로는 참나무 숲이, 앞으로는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야생 한가운데 포도밭이 있다.

이곳은 카스텔로 디 케르체토 (Castello di Querceto·참나무 숲의 성) 소유로 1897년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해 온 프랑수아 가문이 휴가를 보내던 농장을 본격적인 와인 농장으로 개발했다. 오너인 알렉상드로 프랑수아는 나이가 좀 들었지만 쾌활한 성격에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런 그의 성격은 전통을 중시하는 토스카나 한복판 키안티 지역에서 전통 품종인 산지오베제 대신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생산, 최고 와인을 만들려는 생각을 갖게 했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역작의 첫 단계로 1985년 어느 가을 아침, 수확을 위해 포도밭에 나왔을 때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전날 주변에 살던 멧돼지들이 이곳을 습격해 잘 익은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를 모두 먹어 치운 것이다. 포도나무를 심고 첫 수확을 기다리려면 최소 3년을 고생해야 하므로 그동안의 노고는 수포가 됐다.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이탈리안 특유의 급한 성격 또한 갖고 있던 프랑수아는 바로 마을 사람들과 규합해 멧돼지 사냥에 나섰고 결국 그날 저녁 몇 마리의 멧돼지가 바비큐 신세가 되었다.

‘최후의 만찬’으로 카베르네 포도를 먹었던 멧돼지 고기는 특별한 맛을 보여주었고, 프랑수아는 그 맛을 음미하면서 자신이 만들 와인의 품질에 강한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은 프랑수아의 친구들 사이에서 즐겁게 회자되었고 밀라노에서 와인 중개상을 하던 엠프손과 그의 부인 마리아에게까지 알려졌다. 마리아 엠프손은 피렌체에서 예술을 전공한 작가였는데 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멧돼지 모습을 스케치했고 프랑수아는 이 그림을 레이블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가 그린 다양한 각도의 멧돼지 드로잉은 모두 6장이다. 보통 같은 와인의 레이블에는 한 종류만 사용하지만 치냘레의 경우 6장을 모두 섞어 사용한다.

멧돼지 사건 이후 포도밭에는 울타리가 생겼고 약한 전류를 흘려 원천적으로 멧돼지 습격을 차단하고 있다. 프랑수아는 1986년 첫 빈티지를 생산했고 자신의 예견처럼 좋은 반응을 얻어 유명한 와인이 되었다. 치냘레는 카베르네의 강한 맛과 메를로의 부드러움이 잘 표현된 와인으로 1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다.

포도밭의 고도가 높아 신선한 맛이 느껴지며 야생의 여러 붉은 과일 맛과 향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와인이다.
동물은 배가 고프면 무엇이든 먹겠지만 선택이 있다면 분명 야성적인 감각에 따를 것이다.

치냘레 와인은 치냘레(멧돼지)가 골랐고, 첫 수확에서 손실은 있었지만 재미있는 일화를 남겨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수아는 이제 포도밭 옆에 멧돼지를 위한 기념 포도나무라도 심어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토스카나 키안티 지역에서 바비큐로 사라진 치냘레의 은공을 기리며.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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