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진혁 칼럼

대통령이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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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의 얼굴은 무수히 많다. 그는 대통령이자 정치인이요, 행정부 수반이자 군 통수권자다. 나라 제1의 외교관이자 대변인이기도 하다. 또 그가 남자라면 그는 누구의 남편이자 아버지이기도 하고, 누구의 아들이자 사위이기도 하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레온 파네트에 따르면 이밖에도 대통령은 재앙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돌봐줘야 하는 국목(國牧)이기도 하며 수많은 손님을 맞아야 하는 집주인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얼굴은 이처럼 많고 그의 역할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때문에 대통령의 역할 중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도 있고 경우에 따라 포기해야 할 역할도 생긴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대통령은 다른 모든 역할에 우선하여 대통령직에 전념해야 한다. 예컨대 훌륭한 대통령이냐, 훌륭한 아들이냐의 기로에 섰다면 훌륭한 아들을 포기해야 한다. 훌륭한 대통령이냐, 훌륭한 여당 총재냐의 경우에는 여당 총재를 포기해야 한다. 미국 존슨 대통령의 말대로 아무리 대인(大人)이라도 능력 부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대통령 직이다. 그만큼 일이 많은 것이다.

*** 한쪽 지지하며 중립지킨다?

이런 상식적인 얘기를 왜 새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대통령의 직책 수행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문제를 둘러싸고 정국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야당에서는 대통령 탄핵을 들고 나오고, 청와대는 선관위의 위법 판정을 받은 후에도 대통령이 왜 정치발언을 못 하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은 정치인인데 어디에 가서 누구를 지지하든지, 발언하든지 왜 시비를 거느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문제는 '대통령'과 '정치인'의 충돌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선거중립을 지켜야 하고, 정치인 노무현은 여당을 위해 뛰고 싶다. 이런 경우 당연히 '대통령직 우선'이어야 할텐데도 盧대통령은 두가지를 다 하겠다는 것이다. 중립을 지키면서 한쪽을 지지한다? 실제 이것이 가능한가. 이런 태도가 대통령으로서 과연 온당한가. 그는 또 "열린우리당을 지지하지만 어떤 행정력도, 한 사람의 공무원도 선거에 동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기침을 하면 밑에서는 늑막염이 걸린다"는 말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의 눈짓 하나, 말 한마디가 '지시'가 되고 '방침'이 되는 게 우리의 오랜 공직풍토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지금은 민주화로 많이 달라졌다고 하겠지만 그런 풍토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당장 이번 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정부와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에도 유능한 법률가가 수없이 많지만 그들 중 누구도 대통령 의견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나오고 여론이 물끓듯 하는 데도 여권에서는 누구 하나 "선관위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다. 아직도 이런 현상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대통령이 동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고 뛸 사람이 수없이 나올 것이다.

공직사회뿐 아니다. 민간도 대통령을 따라간다. 대통령이 호남을 중용하면 기업도 호남을 중용한다. 대통령이 386을 기용하면 민간에서도 386이 득세한다. 심지어 음식까지 따라간다. YS 때엔 아구찜이 유행하더니 DJ 때엔 매생이국이 널리 퍼졌다.

*** *** 盧, 대통령직 좀더 무겁게 알아야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란 이런 자리다. 말 한마디, 표현 하나도 신중하고 무겁게 하지 않으면 안될 자리다. 盧대통령도 이제 1년 경험을 쌓았으니 대통령직을 좀더 무겁게 알았으면 한다. 사실 지금껏 그는 자기 직책을 가볍게 여기는 듯한 발언이 잦았다. "못해 먹겠다" "대통령직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등의 발언은 대통령의 언어일 수 없다. "불법자금이 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물러간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직을 정치 도박에 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렇다. 선거 때라고 대통령직을 정치인 역할 밑에 둬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선거철을 맞아 피가 끓더라도 '대통령직 최우선'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가볍게 만들고 정권 불안정성을 드러내면 곧 정국 불안.국정 불안.국민 불안이 되고 그것 자체로 국익을 해치게 된다. 항상 대통령이란 누구인지를 깊이 헤아려야 할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