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중년의위기>5.中年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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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3월초 국내 굴지의 제조업체 영업파트 부장 P(44)씨가 간암으로 숨졌다.
76년 그룹공채로 입사한뒤 줄곧 영업분야에서 근무해오다 임원승진을 앞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금년1월 그의 배에 물이 차불러오는 것을 부인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얘기였다.
P씨는 자신이 간암에 걸린 사실을 2년전 알았으나 회사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출근을 계속했다.숨지기 약1년전부터 그는 매일 점심시간이면 어디론가 혼자 외출했었는데 직장동료들은 영어학원이나 헬스클럽쯤에 가려니 생각했었다.
진짜 행선지가 병원이었고 통원치료로 연명했었다는 사실을 가족도,직장동료도 그가 입원한뒤 알았다.
그는 다소 내성적 성격이었지만 거래선을 만날 때는 누구보다 활달한 매너를 구사했던 것으로 동료들은 기억한다.
그가 병을 숨긴 이유는 알길이 없지만 생전의 부하였던 한 직원은 『집에도 회사에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극단적 책임감 때문 아니었겠느냐』며 재능있고 성실했던 상사의 요절을 아쉬워했다. 그는 부인(38)과 중1,국민학교 5학년의 두 아들을 이승에 남겼다.
지난 12일 오후 K증권회사 경리부장 L(48)씨가 회사 화장실에서 갑자기 쓰러져 그날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20여년 증권계에 몸담았던 그는 「불도저」 「일벌레」라는 별명이항상 따라다닐 정도로 일에 매달려왔다.그는 그날도 외부감사를 준비하느라 회의를 주재하는등 평소의 일욕심을 부리다 쓰러졌다.
회사의 한 동료는 『지난해 고혈압이 갑자기 악화돼 안정을 취하도록 권유했지만 출근을 고집했다』며 『부인과 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과 승진을 앞둔 시점이 마음에 걸려 선뜻 쉬지 못했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경쟁과 질주의 세월을 살아온 많은 중년 샐러리맨들이 어느날 갑자기 불귀의 객이 되고있다.화이트칼라의 이같은 죽음은 산업재해인가,개인의 지병 때문인가.순직인가,자연사인가.
P씨나 L씨의 경우처럼 생전의 직장이 든든한 기업인 경우 회사는 굳이 이런 문제를 따지지 않고 고인과 유족에게 각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보통이다.실제로 이들이 다녔던 회사들은 퇴직금외에도 상당한 배려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살림이 넉넉지 못한 기업인 경우 과로사 또는 순직 여부를 놓고 유족과 회사간의 다툼이 잦다.
공공보험 성격인 산업재해보상연금이 화이트칼라에게도 지급될수는있으나 지급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이 산재여부를 까다롭게 따지는데다소속기업 역시 이 연금을 많이 타내면 보험요율이 올라가기 때문에 산재처리에 인색한 경향을 보인다.이때문에 소송도 잦다.
이들이 죽음에 이른 사연이 의사의 소견서나 판사의 판결문으로충분히 설명되겠는가.설사 재판에 이겨 상당한 돈이 지급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죽음이 유족과,직장과,사회에 남긴 상실의 부피가메워지겠는가.
金泳燮.李鍾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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