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34.90년백두산 대국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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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이튿날 새벽.정상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천지가 발 아래 있었다.침묵의 바다.수억년에 걸친 강력한 침묵에 모두 얼어 붙었다.구름 한점 없는 쪽빛 하늘,전설로 덮인 영봉의 그림자가 그 속에 드리워져 있었다.등 뒤로 는 거대한 원시의 숲이 고조선의 역사를 품은 부여평원과 맞닿아 있었고,건너편 북한땅엔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이 우뚝 솟아 있었다.그 너머로 갈 수 없는 땅이 아스라한 함성처럼 슬픔을 자아내고 있었다.曺9단과 도전자 劉4단이 평평한 바위에 바둑판을 놓고 마주앉았다.그때 공안이 빙긋 웃으며 다가오더니 『돌은 단 한개도놓지 못한다.촬영도 금한다』며 멀리 가물가물 보이지도 않는 북한측 초소를 가리켰다.『그들이 보고 항의한다』는 것이다.그는 사진기자 몸을 수색하여 모든 필름을 압수한 뒤 담배를 발로 부벼끄며 돌아섰다.천지 곁에 떨어진 양담배 꽁초는 어찌보면 자기땅을 지키지 못한 우리를 향한 최대의 모욕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전11시부터 천지호텔에서 지금은 유명해진 백두산 대국이 벌어졌다.백두산의 영기를 담은 천하의 명국은 늦은 밤 끝났다.승리한 曺9단은 감동을 이렇게 토로했다.
『승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백두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바둑을 남기고 싶었다.』 대국중 잠잠하던 공안이 다시 찾아와 말했다.『만약에 압수한 필름중 백두산에서의 대국 사진이 나오면사진기자는 출국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진은 귀국한 뒤 잡지와 신문을 장식했다.사진기자가 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내 구두뒤축에 필름을 숨겨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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