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당적 없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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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은 역시 화끈하다. "국민이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믿는다." 비유나 우회 화법도 아니다. 열린우리당을 찍어달라는 직설적 대국민 호소다. 여기저기서 와글와글하자 "대통령도 정치인인데 누구를 지지하든 왜 시비를 거느냐"고 되레 호통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뒤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선거 중립'을 다짐했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대통령이 워낙 거세게 나오니 헷갈린다. "정당정치를 표방하는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여당의 선거지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맞는 말이다. 미국도 그러니까. 미 의회선거가 있었던 2002년 부시 대통령은 70차례나 공화당의 정치자금 모금행사에 참석해 1억4000만달러를 거두어줬고, 선거 막판 5일 동안 15개주 17개 도시를 돌며 지원유세를 펼쳤다. 그걸 놓고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 당연한 언행을 중앙선관위는 왜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정했을까. 궁금해서 몇몇 학자들에게 물어봤다. 한결같이 우리와 미국은 사정이 다르단다. 법도 다르지만 현실여건과 국민정서도 다르다는 게 학자들의 설명이다. 삼권분립이 완벽한 미국은 의회의 힘이 막강한 데다 공무원 사회 역시 탈정치가 몸에 배어 있어 대통령의 지원유세가 공무원 조직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요? 당장 청와대부터 사실상의 선거대책본부로 바뀌지 않겠어요. 국정원과 경찰은 또 어떻고." 달라진 참여정부를 모독하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나 공무원 사회를 보는 대체적 시각은 아직 이렇다.

盧대통령은 아마도 정당정치의 정신에 따라 주어진 활동영역을 십분 살리겠다는 의도였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에 앞서 시비의 소지부터 없애는 게 중요하다. 법규정을 손질해 총선지원을 포함한 대통령의 정치활동 범위를 보다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盧대통령이 당적도 갖지 않은 채 특정 정당을 원거리 지원사격하는 모양새도 어색하다. 보기에 따라선 비겁하게까지 비친다. 형식보다는 실질이요, 가식보다는 솔직함이 盧대통령의 무기 아닌가. 이리 꿰고 저리 따질 게 아니라 열린우리당에 토 달지 않고 입당하는 모습이야말로 盧대통령 코드에도 어울린다. 오히려 열린우리당 쪽에서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입당 연기를 요청한다는 소리가 들려 딱한 생각도 들지만 그건 정도가 아니다.

입당을 미루는 것은 선거결과에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총선은 국회의원을 뽑는 행사이면서 아울러 현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당의 이름으로 盧정부 1년에 대한 평가를 자청하는 게 당당한 자세다. 중간평가 결과와 재신임 여부는 별개 문제다.

입당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변정리다. 노사모 등 외곽 조직을 모두 당원에 가입토록 해 공조직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다. 노사모를 외곽 조직으로 계속 끌고 가는 것은 선거전략상 이로울지는 모르나 정당정치를 왜곡할 소지가 많다. 정치개혁 또는 선거를 감시하는 단체로 포장하더라도 그들이 '노무현당'을 지원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정당정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조직부터 정상적인 형태로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

또 중요한 일이 있다. 집안 단속이다. '깨끗한 정치'를 입에 달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현장에선 그 더럽다는 돈선거 타락을 가장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를 막는 게 대통령이 여당의 선거를 '합법적'으로 도와주는 길이다. 이는 또한 '시민혁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