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한인거상들>3.끝 연변항운공사 全龍萬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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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남북관계가 유화국면이건 경수로회담이 결렬돼 꽁꽁 얼대로 얼어버린 지금과 같은 경색국면이건 한달에 한두번씩 꼬박꼬박 동해바다를 통해 양측의 항구를 직접 오가는 화물선이 있다.
이 배의 선주(船主)는 중국 길림성연길에 있는 「중국연변항운공사」전용만(全龍萬)회장이다.
지난 3월에도 청진 수성천에서 채취한 강모래 1만7천t을 청진東항에서 선적해 동해항에 부렸다.
全회장은 지난 2월14일에도 북한측의 갑작스런 요청에 따라 동해항에서 모래를 부린 빈 화물선에 급히 설탕 1백t(4만5천달러어치)을 담아 청진東항에 하역시켰다.이중 50t은 평양으로납품됐는데 이틀후(2월16일)로 다가온 김정일(金正 日)생일준비에 사용됐다고 한다.
「연변항운」이 1년간 담당하는 남북간 해운물동량은 총1백50만t.t당 운반비가 15~20달러라고 하니 남북교역을 통해 약2천5백만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이 가운데 모래운반을 통해 버는 돈은 4백만달러정도.
-85년 「연변 대외경제무역개발공사」라는 무역회사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남북직항쪽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었는지요. 『우리그룹 6개사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회사가 해운업을 하는 「연변항운」인데 92년10월에 창립됐죠.주로 중국.
한국.일본을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릅니다.
93년이 되자 연변지역서 급팽창하고 있는 한국의 2백여 현지기업들이 불평半 제안半 아이디어를 주더군요.인건비가 싸서 연변으로 진출했는데 운송비가 비싸 별 도움이 안된다,남북한 직항로를 뚫어보면 어떤가 하는 얘기죠.』 한국기업들이 권한 코스는 연길~도문(두만강변 중국쪽 국경)~남양(두만강변 북한쪽 국경)~ 청진항(철로)또는 연길~삼합(중국쪽 국경)~회령(북한쪽 국경)~청진항(도로)으로 육로운송하고 거기서 뱃길로 한국.일본등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연길~청진항은 연길~대련항 거리의 5분의1도 안되는 2백㎞미만이다.
『남북간 해운직항허가를 따내기 위한 양측 당국과의 본격적인 교섭에 들어갔습니다.북쪽은 의외로 쉽게 승인이 났어요.한국은 항만청과 통일원을 수십차례 드나들어야 했습니다.무엇보다 국가보안법상 적성국과의 교통은 안된다는 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형식논리보다는 「해운수송은 경제교류의 가장낮은 단계다」「한국기업에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같은 주장을 폈지요. 결국 통일원의 승인과 항만청의 「특별지침」에 따라 남북한 직항이 성사됐습니다.』 회장은 기업경영뿐 아니라 인생전체를통해 가장 큰 성취감과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 지난해 3월15일있었던 부산~청진 직항로 운항식이었다고 했다.남북분단후 최초로열린 항로다.
연룡(延龍)4호로 명명된 중국국적의 적재톤수 1천6백t짜리 세미컨테이너 화물선은 부산에서 출발해 청진항에 입항했고 화물은곧 철로를 통해 연길로 수송됐다.
청진항~동해항,남포항~인천항 코스가 추가로 허가됐다.1년 남짓,지금까지 연변항운 배의 왕복운항 수는 20여차례.
-남북한 직항로 개설뒤 회사가 크게 성장한 것 같습니다.어려운 시절 얘기좀 해 주시죠.
『사실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것은 조선족 선원을 한국배들에공급해주는 선원송출사업을 하기 시작한 90년부터였습니다.
당시 경영하던 무역회사는 파산 일보직전이었고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서울에 갔지요.동행한 직원은 비행기 표값을 구하려고 남대문시장 지하도에서 우황청심환을 팔아야 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하늘이 도와 한국특수선주식회사의 박종규(朴鍾圭)회장을 만나「중국선원고용 계약서」를 체결했습니다.
이젠 살았다싶어 눈물이 앞을 가렸던 그날이 아직도 선합니다.
朴회장은 제 기업인생의 은인이지요.』 全회장은 남한교역을 통해얻은 물적.인적성과를 북한쪽에 연결시키려 하는 전형적인 대남북(對南北)거간 상인이다.그런 만큼 북한경제의 잠재력을 확신하고있는 기업가다.
[延吉=全榮基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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