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 장악한 ‘부드러운 카리스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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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한국 대표팀의 허정무 감독<右>과 곽태휘가 우승 트로피를 맞잡은 채 환히 웃고 있다. [충칭=뉴시스]

허정무(53) 축구 대표팀 감독이 달라졌다.

깐깐하고 엄격하던 스타일에서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선수들이 깜짝 놀랄 정도다.

8년 전 허 감독 아래서 A매치에 데뷔한 주장 김남일은 “올해초 대표팀에 들어올 때 걱정을 많이 했다. 예전에는 선수들을 가둬 두려고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모셔 보니까 생각이 열리신 분으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포항에서 허 감독이 사령탑으로 있는 전남으로 이적하게 된 고기구가 짐을 싸면서 “이젠 죽었구나”라고 장탄식한 것은 축구 선수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다. 그만큼 허 감독은 선수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새벽 훈련을 시켜 놓고는 몰래 숨어 농땡이 치는 선수를 찾아내 불호령을 내리는가 하면 숙소 생활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일일이 체크했다. 이로 인해 선수들 사이에서는 ‘독불장군’이란 별명이 붙였다.

그런 허 감독이 지난해 말 대표팀 지휘봉을 잡으면서 ‘자상한 큰형님’으로 180도 바뀐 것이다. “나를 따르라”는 외침에서 “함께 가자”는 설득으로 바뀌었다.

◇독불장군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김남일은 “한마디로 다 바뀌셨다. 선수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염기훈은 “남일이 형에게서 힘들 거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겪어 보니 정반대였다”고 평했다. 박원재는 “엄격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한 달간 좋은 분위기에서 훈련했다”고 말했고, 말수가 적은 박주영조차 “공격수로서 가져야 할 기술과 마음가짐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많이 배웠다”고 거들었다.

허 감독의 변신에 대해 축구인들은 “8년 만에 한국인 감독 체제가 들어선 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클 거다. 이런 점에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한다는 차원에서 스스로의 눈높이를 낮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선수들과 숨바꼭질하는 스타일로는 선수들 장악이 어렵고, 그런 상태에서 좋은 결실을 거두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우쳤을 것이란 설명이다. 여기에는 정해성 수석코치의 역할도 작지 않았을 것으로 축구인들은 보고 있다. “선수들을 보듬고 가자”는 조언이 그것이다.

◇한국인 감독도 성공할 수 있다=김남일은 “우리 선수들의 기술이 전에 비해 많이 늘었다. 하지만 그동안 외국인 감독들이 사령탑을 맡으면서 정신력은 떨어졌다”며 “허 감독님 부임 이후 예전의 강한 정신력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업그레이드됐고 희망을 봤다”고 밝혔다.

이런 달라진 리더십에 힘입어 한국 축구는 23일 폐막한 제3회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다. 허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에 복귀한 이후 첫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최종일인 이날 한국은 일본과 1-1로 비겨 나란히 1승2무를 기록했지만 다득점(한국 5골, 일본 3골)에서 앞서 우승했다. 김남일은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충칭=최원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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