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실적없는 진보, 자부심없는 보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오로지 실적에만 초점을 맞추는 정치는 볼품없다. 당장의 정치게임에서는 득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품격도 없고 긍지도 없다. 거기에는 이해타산만 있을 뿐 애정도 존중도 있을 턱이 없다. 실적을 내지 못하는 진보, 자부심과 희망이 없는 보수 모두 우리가 갈 길이 아니다.

최근 일본 게이단렌(한국의 전경련) 초청으로 일본 기업인과 정치인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옴론(Omron)그룹의 전임 회장 다테이시 노부오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일본 기업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의식을 도입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옴론의 기업이념은 ‘기업은 사회의 공기(公器)’였다.  

그가 말하는 CSR은 기업이 이익을 남기고 법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노동 윤리와 공정거래 윤리도 지켜야 하고 능동적으로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대기업은 하청 기업과 위탁판매인에게도 CSR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위반 여부를 감독할 책임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일본의 한 대기업은 전 세계 9000개 하도급 업체와 친환경·노동규약 준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CSR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기업의 목표는 이익을 남기는 것인데, CSR 비용이 상품에 전이돼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것 아니냐”고 다테이시 전 회장에게 물었다. “CSR이 오히려 경쟁력 강화의 요인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2010년 10월께에는 CSR을 지키는 기업에 ‘ISO(국제표준화기구) 26000’ 인증을 받는 기준이 마련될 것이며, 소비자는 그런 기업에 더욱 신뢰를 가지게 되고, 또 기업은 이를 판매전략으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CSR을 지키지 못해 불신을 받게 될 경우 발생할 손실을 감안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드는 비용이 오히려 적은 것이라는 논리다. 중국 정부도 해외에 진출하는 기업에 CSR을 적극 권유하고 있다.

손해를 보더라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기업에 말해봤자 소용없다.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CSR을 준수하는 것이 기업에 손실을 주지 않는다면 여기에 동참하지 않을 기업이 없다. 그렇게 되면 기업도 사회도 함께 이익을 보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정책적 목표가 사회 구성원에게 도움이 되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최선이다.

새 정부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의 많은 재산과 논문 표절 의혹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정당하기만 하다면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유능한 인재를 찾았는데 우연히 그런 사람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결과 첫 출범하는 정부가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고려했어야 했다. 집이 한 채인 사람이 드물 정도라면 문제가 있다. 우리 국민은 부동산에 대해서는 유난히 엄격하다. 표절 문제도 상식 선에서 판단하는 게 마땅하다.

이명박 정부가 오늘 출범한다. 일 잘 하는 대통령에게 일 잘 하는 정부가 되었으면 하는 게 국민의 바람이다. 기왕이면 그 내각이 국민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심정적 거부감은 느끼지 않도록 했더라면 좋았으리라. 명분과 현실을 잘 섞어내는 것이 정치력이다.

김두우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