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신이 왜 없는가” … 황제는 답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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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통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군주였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측근이었던 프랑스인 정무 고문 알퐁스 트레믈레가 1906년 5월 19일 독일 외무부 차관에게 쓴 서신에 나타난 고종의 모습이다.

1905년 11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종과 정부 대신을 위협해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다. 이후 고종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일본이 임명한 친일 미국인 외부(외무부) 고문 스티븐스의 허락 없이는 외부와의 통신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뿐만 아니라 한국에 주재한 외국 외교관도 마찬가지였다.

트레믈레의 서신에는 “오래전부터 일본 정부는 한국 통신원(우편국)을 장악했고, 교신의 비밀성과 불가침성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자 외국 공사 몇 명은 외교문서 송달용 선박에 직접 가서 전달하거나 받아야 했다”라고 쓰여 있다.

베를린에서조차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 문서의 철저한 보안을 강조했다.

그는 “황제 폐하께서 이 극비 내용이 담긴 서신을 번역시킬 경우,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불행하고 온화한 대한제국 황제에게 새로운 분쟁의 불씨가 될 일본 대사관에는 의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적었다.

고종은 일본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 산둥(山東)반도의 옌타이(煙臺)나 칭다오(靑島) 등 중간 연락지를 거쳐 해외 공관에 훈령을 보내게 된다. 트레믈레는 “자신의 허락 없이 외부대신의 이름으로 외국 주재 대표들에게 훈령과 교신이 보내지거나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한제국 황제는 상하이, 옌타이 혹은 칭다오를 경유해서 그들에게 직접 훈령을 보내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달인 12월, 고종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유럽 3개국 공사들에게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에서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대한제국의 확고한 의지를 해당 정부에 강력히 전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서신에는 “ 고종 황제는 본인(트레믈레)을 통해 외국에 주재하는 대한제국의 대표들에게 ‘무력으로 승인케 하려던 이 조약안을 짐이나 짐의 정부는 승인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각 정부에 전달하면서 강력히 항의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이 공문은 대한제국의 대표를 통해 12월 중 각 정부에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고종은 1차 훈령에 대해 어떠한 답신도 받지 못했다. 답답해진 고종은 1906년 1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쓴 친서를 트레믈레가 직접 유럽으로 가서 전달하게 한다. 문서에는 “1월에 대한제국의 대표들로부터 답신을 받지 못하고 교신이 더욱 어려워지자 황제는 본인에게 유럽에 가서 자신의 공사들을 도와주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본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열강에 전달할 여러 통보를 그들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고 돼 있다.

원낙연·하현옥 기자

 ◇도움 주신 분들=정상수(명지대 국제학연구소)연구교수·전정해(국사편찬위원회) 박사·파스칼 그럿트(이대 동시통역번역대학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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