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지금 詩와 열애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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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3일 오후 파리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테른가(街) 26번지. 대형서점 프낙의 시집 판매대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시집을 들추고 있었다. 이 책 저 책 뽑아보던 그에게 "시를 좋아하는가"라고 물었다. 피에르 뤼케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남자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자신의 '시(詩)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부터 상징주의를 거쳐 20세기 초현실주의자들까지 프랑스인 특유의 빠른 톤으로 줄줄이 시인 이름을 뀄다. "베를렌과 랭보, 빅토르 위고를 특히 좋아한다"며 "하지만 현대시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헤어지면서 직업을 물었더니 의사라고 대답했다.

지난 2일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는 '최근 들어 프랑스인들의 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고 보도했다. 르 피가로는 아메리카 온라인(AOL)과 공동으로 1500명의 프랑스 네티즌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인용, '응답자의 86%가 시를 읽었거나 읽고 있으며, 68%는 직접 시를 쓰거나 써본 경험이 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프랑스의 시 애호 '바람'은 아마추어 시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다투어 시집 출판에 나서면서 시집 판매량 증가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자 갈리마르 출판사의 문고판 총서부문 발행인이기도 한 앙드레 벨테르는 "포켓사이즈로 출판된 시집들이 특히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한 출판업자는 "아마추어 시인들로부터 하루 평균 다섯건의 시집출판 요청을 받는다"고 말했다고 르 피가로는 전했다.

시를 낭송하는 모임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 시인들의 단체인 '프렝탕 데 포에트'(시인들의 봄)의 예술국장 장-피에르 시메옹은 "예전엔 10명 정도 모이던 시낭송회에 이제는 50명에서 100명 정도는 기본으로 모인다"며 "지난해 한 낭송회엔 2000여명이 몰려 주최 측을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는 시 관련 웹사이트들이 계속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군소 출판사들이 돈이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꾸준히 시집을 출판해온 것이 시가 인기를 되찾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시인이자 플라마리옹 출판사의 발행인인 이브 디 마노는 "시기적으로는 1999년이 전환점"이라고 분석했다. 시 인기에 힘입어 '밀리언셀러 시집'도 탄생했다. '미라보 다리'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첫 시집 '알코올'(Alcools)은 발간 첫해인 1913년엔 겨우 241부만 팔렸지만, 최근 누적 판매부수가 100만부를 넘어섰다고 르 피가로는 전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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