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 퇴진한 쿠바 수도 아바나는 지금 … 특파원 1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쿠바 초등학생들이 혁명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자전거 택시 옆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바나 AP=연합뉴스]

피델 카스트로(81) 국가평의회 의장이 사임을 발표한 다음날인 20일, 쿠바 수도 아바나 거리는 평온해 보였다. 시민들은 여느 때처럼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거리 곳곳에는 카스트로를 그린 대형 벽보가 그대로 걸려 있다. 미국의 오랜 경제 봉쇄로 피폐해진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시내 건물과 도로는 오랫동안 보수하지 않아 금이 가거나 후줄근하다.

“피델이 물러난다니 믿을 수 없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물러나다니 충격이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은 데이론 클라벨론(20·모델)은 50년 가까이 쿠바를 철권 통치해온 카스트로의 은퇴 소식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후아나 에르난데스(61·건설 노동자)는 “피델은 역사적 지도자다. 그가 물러난다니 가슴이 아프다”고 동정했다. AFP 통신이 전한 현지인들의 표정이다.

쿠바인들은 카스트로의 정계 은퇴를 슬퍼하면서도 변화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자신을 안드레스(63)라고만 밝힌 남자는 AP 통신에 “라울이 변화와 더 많은 자유를 가져올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냈다.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은 국방장관으로 2006년 7월 이후 형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해 왔다. 그는 군부를 장악하고 있어 24일 의회에서 무난히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선출될 전망이다.

KOTRA 아바나 무역관의 조영수(44) 관장은 “속으로 형제 세습에 대한 불만이나 민주화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반대 움직임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라울이 집권하더라도 쿠바의 대내외 정책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 관장은 “카스트로는 막강한 카리스마를 휘둘렀지만 동생은 혁명 주체 세력 중 조금 앞선 인물 정도라 그만한 영향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을 일으킨 세력 중 상당수는 70대 고령임에도 여전히 현역에 남아 있다. 조 관장은 “라울은 어쩔 수 없이 혁명 1세대와 집단지도체제적 통치를 해야 할 것”이라며 “서방에 문호를 열 가능성은 작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경제 분야에선 융통성 있는 변화가 예상된다. 라울이 중국식 시장경제에 관심이 많아 계획경제를 완화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라울은 “쥐꼬리만 한 공무원 월급(평균 약 1만8000원)으로는 기본 생활도 하기 힘들다”며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산당이 최종 결정권을 유지하는 선에서 어떤 비판적 토론도 수용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인 쿠바는 전체 취업자의 78%가 공공 부문에서 일한다. 민간 취업자는 22%에 불과하다. 정부가 가격을 결정하고 물품을 배급한다. 자본 투자는 엄격히 제한되고 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교통·일자리·주택· 교육·의료 등이 모두 정부의 책임이나 계속되는 경제 침체로 제대로 서비스되지 않고 있다. 비자를 얻기 힘들어 외국 여행은 하늘의 별 따기고, 고속 통신망이 갖춰지지 않아 인터넷 연결은 인내심 테스트다.

초등학생인 아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가는 리디스 페레스(37·주부)는 “라울의 개혁 약속은 쿠바인들이 학수고대하는 것”이라며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은 정부를 두려워해 뒷방에서나 소곤거린다”고 덧붙였다. 불법 택시 운전을 하는 파블로 구스만(22)은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사람들과 언론이 점점 공개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서방은 카스트로의 사퇴가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U 순회의장국인 슬로베니아는 성명을 내고 “쿠바와 정치적 대화를 재개할 가능성을 타진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EU는 2003년 쿠바 정부가 반정부 인사 75명을 체포한 데 대한 항의로 EU 회원국 정부 인사의 쿠바 방문을 금지했다.

반면 미국은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다. 존 네그로폰테 국무부 부장관은 19일 쿠바의 개혁·개방 등을 촉구하면서 “수십 년 된 쿠바에 대한 금수조치가 조만간 해제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바나에서) 남정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