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태운 허둥지둥 5시간 … 소방본부 기록으로 확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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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은 10일 밤 5시간에 걸친 진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잿더미로 변했다. 소방방재청과 문화재청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사실은 본지가 17일 단독 입수한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의 ‘시간대별 세부조치’라는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소방방재본부는 이 문서를 방화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에 제출했다.

현장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서에 따르면 숭례문에 불이 난 것은 10일 오후 8시48분. 소방관들은 8시57분 숭례문 누각 1층 출입구의 자물쇠를 도끼로 부순 뒤 누각 2층으로 올라갔다. 소방관들이 물을 뿌려 큰 불꽃을 잡았으나 연기는 계속 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부소방서 오용규 진압팀장은 “국보 1호가 훼손될 것을 우려해 방수포(강력하게 물을 쏘는 대포) 대신 (강도가 약한) 분무 방수를 유도했다”고 밝혔다.

숭례문 처마에서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던 9시30분 이후 소방 당국은 숭례문 지붕을 부수고라도 화재를 진압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문화재청 관계자와 협의에 들어갔다.

9시40분 중부소방서 남정오 소방장은 배중권 문화재청 사무관과의 통화에서 “문화재인 점을 감안해 화재 진압에 신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1분 뒤 서울종합방재센터 채규왕 소방장과 통화한 문화재청 김상구 건축문화재과장은 “숭례문이 손상돼도 상관없으니 진화만 해 달라”고 말했다.

다시 3분 후인 44분에 통화한 문화재청 엄승용 문화유산국장은 채 소방장에게 “불길이 번지지 않으면 파괴하지 말고 계속 번질 것 같으면 그때 파괴하라”고 애매한 의견을 제시했다. 경찰 관계자는 “무전 내용에서는 ‘문화재청 관계자 찾아라’ ‘파괴할까요 말까요’ 등 다급한 말들이 여러 차례 오갔다”며 “‘기와장을 뜯어냈는데 그 안에 석회가 있고 또 기와장이 있더라’는 말도 소방관들이 주고받았다”고 전했다.

결국 문화재청과 소방 당국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화재 발생 후 1시간40분이 지나서야 물 대포를 쏴 기와를 날려가며 진화 작업을 벌이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고건축물의 특성상 기와를 걷어내고 적심을 공략해야 하는데도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로 늦어진 셈이다.

소방재난본부장이 10시30분 소방관들에게 “현장에 나온 문화재 전문가를 찾으라”는 급한 지시를 내려 중구청 직원으로부터 건축도면이 확보됐지만 2층 천장 내부를 태운 화염은 이미 기와 사이로 삐져나오고 있었다.

대전에서 올라오느라 현장 도착이 늦어진 문화재청 김상구 과장은 11시38분쯤에야 “건물 부재라도 건져 복원할 수 있도록 중장비로 (지붕을) 부수고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소방 당국이 대형크레인 출동 여부를 확인한 것은 11일 오전 0시4분이었다.

0시10분, 문화재청 관계자는 “1층 누각만이라도 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했다. 0시40분 2층 누각 일부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1시56분 2층 누각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경찰 관계자는 “소방법령의 미비와 소방 당국의 결단력 부족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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