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도굴 '亡者인질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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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IMF체제 아래서 허덕이던 탓인지, 뉴밀레니엄을 코앞에 둔 정신적 공황 탓인지 1999년에는 충격적인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특히 그해 오늘(3월4일). 돈을 노리고 조상의 유골을 파헤친 사건이 발생해 전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날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선친 묘소가 파헤쳐져 유골이 사라지고 롯데측에 8억원을 요구하는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범인들은 "辛회장 부친의 유골을 내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며 현금 8억원을 요구했고,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리면 다른 조상의 묘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분묘를 파헤쳐 유골을 담보로 거액을 요구한 이 엽기적인 사건 앞에서 당시 국민들은 우리 사회의 한탕주의와 금전만능 풍조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설마 그렇게까지 인간이 타락할 수 있을까'하는 심정으로 반신반의하던 시민들은 사건 발생 4일만에 검거된 범인들이 단순히 금품을 노린 범행이었음이 밝혀지자 할말을 잃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며 범행을 공모한 동네친구 두사람은 당시 출간된 辛회장의 자서전 <신격호의 비밀>을 읽고 범행현장을 답사한 후, 묘를 파헤쳐 유골의 일부를 절단 비닐봉지에 담아 자기집 옥상에 숨겨 놓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올해 삼성 이건희 회장에 이어 한국의 부호 2위에 오른 신격호 회장은 19세 때 일본으로 무단가출해 성공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로 효심이 깊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당시 조상의 묘를 찾아 관리하는 성모객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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