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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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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황선홍(黃善洪·40)도 이 테두리 안에 있다. 그는 외로운 유소년기를 보냈고, 국내 운동선수 중에서 가장 오래 악질적인 비난에 시달렸으며, 최고의 순간마다 달려든 부상의 덫에 걸려 넘어졌다. 그래도 그는 세상과 남을 향해 분노를 폭발하지 않았다. 그는 중앙M&B에서 펴낸 자서전 『황선홍, 그러나 다시』에서 ‘나는 착하다. 마음 여려 상처 잘 받고, 싫은 소리는 절대 못한다’고 자백(?)했다.

그런 황선홍이 살벌한 정글인 프로축구판에 감독으로 뛰어들었다. 황선홍은 지난해 12월 부산 아이파크와 3년 계약을 했다. 부산은 지난 시즌 중에 감독 두 명이 떠났고, 14개 구단 중 13위를 했다. 군 팀인 광주 상무를 빼고는 프로 구단 중 꼴찌다.

축구계에서는 “사람 좋은 황선홍이 덥석 감독직을 물었다가 너무 일찍 망가지는 것 아니냐”며 걱정 반, 호기심 반의 시선을 보낸다. 그래서 얼마 전 황 감독과의 인터뷰 자리가 마련됐을 때 더 신경이 쓰였다. 그 속내의 한 자락이라도 끄집어내고 싶었다.

지도 철학을 묻자 황 감독은 “‘리더십=카리스마’라는 도식은 이미 깨졌다. 리더십은 군림이 아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게 있어야 잘 굴러가고 오래 간다”고 말했다.

좋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 믿음이 깨지는 상황이 오면 어쩔 것인가. 전반을 2-0으로 압도했는데 방심하다가 2-3으로 역전패했다면.

황 감독은 ‘후∼’ 한숨을 내쉰 뒤 “어렵네요. 속은 상하겠지만 그래도 선수들을 믿고 가야죠”라고 대답했다.

모진 질문은 계속됐다. 개막전 지고, 그 다음 경기도 지고, 그렇게 5연패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황 감독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우리는 5연패 아니라 10연패도 예상하고 시즌을 구상한다. 다만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성적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처음 갖고 있던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황 감독은 ‘욕을 먹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이기는 축구보다 재미있는 축구를 하겠다” “골을 먹더라도 공격 축구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패전이 쌓이면서 팬들의 눈초리는 점점 치켜올라가고, 감독은 심장이 옥죄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선수들에게 “괜찮아. 나는 너희를 믿어. 너희도 나를 믿고 따라와”라고 할 수 있을지, 황선홍은 그게 두려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본능이 있다. “공격수들이 좋은 골 찬스를 살리지 못해 졌다”고 말하거나, 페널티킥을 불어주지 않은 심판을 향해 눈을 부라리거나, 꼭 필요한 선수를 뽑아주지 않는 구단을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황 감독이 말한 ‘신뢰’는 금이 간다.

일본에서 전지훈련 중인 부산은 6일 J-리그 중위권 팀인 요코하마 매리너스에 0-3으로 완패했다. 황 감독이 “너희는 지는 데 익숙해진 지난해 모습 그대로다. 아직도 프로의식이 뭔지 모른다”고 선수들을 질타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시련의 예비 종이 울렸다.

3월 9일 황 감독은 전북 현대와의 경기를 시작으로 초보 감독 시즌을 연다. 그가 처음 결심과 신선한 리더십을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소설 『빙점』을 쓴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첫 키스의 짜릿함이 눅눅한 권태기로, 첫 출근의 설렘이 습관성 지각으로 바뀌는 순간 인생의 가치는 반토막난다는 얘기다. 황선홍이 무서워하는 건, 정작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