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순구의 역사 칼럼

조선 맏며느리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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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70)과 고봉 기대승(1527~72)은 총부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총부란 남편이 죽고 없는 맏며느리를 말한다. 퇴계는 총부에게 제사권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고, 고봉은 둘째 아들에게 제사를 넘겨야 한다고 봤다. 요즘 같으면 제사권이 누구에게 가든 무슨 상관이랴 싶지만, 당시에는 한다 하는 두 학자가 편지로 묻고 답하기를 할 만큼 중요한 논제였다. 도대체 왜 이런 논쟁이 있게 된 것일까?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성종의 아들인 무산군(茂山君)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첫째가 귀수, 둘째가 미수, 셋째가 석수였다. 그런데 큰아들 귀수가 아들도 없이 일찍 죽고 말았다. 귀수의 부인 즉 총부가 살아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둘째인 미수가 집안 제사를 잇도록 했다. 미수는 제사뿐만 아니라 무산군으로부터 이어지는 종실의 작호(爵號)까지 받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귀수 부인이 셋째 석수의 아들 하나를 데려와 양자로 삼았다. 그러니까 죽은 귀수에게 아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귀수 부인은 총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집안의 제사권을 돌려 달라고 했다. 이미 둘째네로 넘어가 10년이나 된 제사권을 무슨 수로 되돌린단 말인가.

1551년(명종 6) 8월 조정은 이 문제로 뜨거웠다. 그대로 둘째 아들이 제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총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여기서 왕은 총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적자(嫡子)가 제사를 주관하는 것은 천하에 공통된 법이다. 그러니 제사를 이어서 주관하는 일은 귀수에게로 영원히 정하도록 하라. 그런데 미수는 10여 년 동안 재상의 반열에 있었으니 지금 와서 그 작호를 빼앗기는 미안하다. 작호는 그대로 주도록 하라.” 이후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거쳐 총부와 양자에게 제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조선에서 보편적인 원리로 자리 잡았다.

무산군 집안 쟁송에서 귀수 부인은 만만치 않은 역할을 했다. 양자 들일 만한 조카가 생기기를 기다려 결국 상황을 바꿔놓지 않았던가. 흔히 우리나라에서 양자 들이기가 중국보다 심했던 것이 남자들의 의리와 명분론 때문이라고 하나, 사실은 이 총부의 의지가 중요했다. 총부는 제사권을 잃어버리면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 맘씨 좋은 시동생이라면 종가에 그냥 눌러 살 수도 있겠지만, 사나운 시동생을 만나면 재산도 없이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 퇴계가 둘째에게 제사권 주는 것을 걱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총부는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양자 들이기에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가능한 한 먼 친척에게서 양자를 데려오려고 했다. 바로 밑 시동생에게서 데려오면 생부인 시동생의 영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조선 말 조대비(추존왕 익종비)가 대원군의 아들을 양자로 지목한 것은 이러한 총부권 발동의 한 사례다. 조선의 맏며느리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그 저력이 어디로 가겠는가. 이 명절에 묵묵히 제사를 치러내고 있는 모든 맏며느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 힘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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