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 당선인님 이러시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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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아스팔트 신세네.”

“그러게 말이야.”

지난달 말께 대통령직 인수위가 있는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인근 거리를 살피며 오가던 청와대 경호원 두 명이 이 같은 ‘푸념’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인수위에 머무는 동안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나왔다.

실제 이 당선인을 만나 청와대 경호실(향후 경호처)의 노동 강도가 세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비서실 관계자는 4일 “이 당선인이 워낙 에너지가 넘쳐 경호실이 오랜만에 정신없이 바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부터 노무현 대통령 때에 이르기까지 10여 년간 경호실은 ‘한가한’ 편이었다. YS는 아들 현철씨 문제가 불거지면서 바깥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노 대통령은 교통 통제 등으로 시민들이 불편을 느낄까봐 청와대 밖으로 나서길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당선인은 비서실에서조차 “당선인이 대선 후보처럼 움직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현장을 즐겨 찾는다. 3일 서울 봉천동 원당재래시장을 돌았고, 2일엔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중증장애아동 시설을 찾았다.

당선인 일정표에 별 일정이 없다는 ‘통상 업무’로 잡혀 있을 때도 자택 또는 통의동 당선인 사무실에 머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이라도 간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대통령 경호를 위해 경호실 관계자는 사전에 현장을 방문, 동선을 파악하는 건 물론 현장 관계자들과 시나리오까지 짠다. 간담회의 경우 발언 순서는 물론 내용까지 조율할 때도 있다. 최소한 행사 전날 세세한 계획이 나온다. 당일에도 동선을 재차 파악하고 필요할 경우 검색대를 설치하거나 폭발물 탐지견을 동원한다.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이 당선인이 움직일 때는 근접 경호팀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을 살피는 경호원들도 동원된다.

이 당선인의 거의 모든 일정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니 경호원들로선 죽을 맛이라고 한다. 또 다른 비서실 관계자는 “이 당선인이 불쑥 어디로 가자고 하는 일도 있어 선발팀 3개 조가 정신없이 돌아가면서 일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당선인이 경호에 협조적이지 않은 것도 ‘골치’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대국민 접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전날 원당시장이 한 예다. 이 당선인은 시장을 돌던 중 단호박 찜떡과 어묵을 사서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장사가 안 된다”고 하소연하는 생선가게 주인에게 이끌려 정해진 동선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경호 수칙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당선인의 경호를 오랫동안 해왔던 한 인사는 “당선인이 먹을 음식을 검식 요원이 미리 점검 차원에서 먹어야 하는데 이날은 순대국밥이었다”며 “이 당선인이 엉뚱한 음식을 먹을 줄 누가 알았느냐. 그렇다고 시장통 음식을 다 먹어볼 수도 없고…”라고 하소연했다.

국민과의 접촉이 늘다 보니 과잉 경호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있다. 이 당선인이 움직일 수 있도록 경호원들이 동선에 있는 사람들을 무례하게 밀치는 일이 대표적이다. 한 측근은 “경호원들에게 오버액션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아직 덜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선 “경호실이 정부조직 개편으로 인해 경호처로 축소되는 걸 막기 위해 정치권에 집중 로비하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 당선인이 취임하면 달라질까. 당선인 비서실에선 “외부 일정이 줄 순 있겠지만 과거보다 밖으로 훨씬 자주 나가는 대통령이 될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 이 당선인 스스로도 “일주일 내내 청와대에 있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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