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2조 빚 덩어리? … 이제 성과 낼 차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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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24면

지난달 31일 충북 음성의 동부하이텍 공장. 반도체 설계업체들이 제작을 의뢰해온 반도체를 만들어주는 곳이다. 생산동에서 만난 박경신 공장장(상무)은 집무실 책상 옆에 매트리스를 접어둔 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숙소가 코앞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매트리스를 편다”며 멋쩍게 웃었다. 출퇴근에 걸리는 10분도 아쉽다는 얘기다. 박 상무는 “지난해 7월 공장장으로 온 뒤 하루도 쉰 날이 없다. 이번 설에도 잠깐 성묘만 다녀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집념 김준기 동부 회장

박 상무가 이렇게 바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껏해야 월 2만 장이던 웨이퍼 작업량이 최근 두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박 상무는 “지난달 공장가동률이 102%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반도체 업체 경쟁력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수율(정상품 비율)도 90%까지 올라 기술 도입선인 일본의 도시바로부터 감사 편지를 세 통이나 받았다고 자랑한다. 그는 “내년에 월 5만 장 생산목표를 달성하면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부천공장도 요즘 분위기가 좋다. 제조팀의 도익수 차장은 “수주 물량이 늘어 통로를 좁히고 생산라인을 확장했다”며 “현재 월 3만5000장의 웨이퍼를 가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부하이텍에 대한 시장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1일 현재 주가가 7190원으로 지난해 5월 동부일렉트로닉스와 동부한농을 합병해 동부하이텍으로 상장한 이후 가장 많이 뒷걸음질쳤다. 특히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최근 자신이 갖고 있는 동부화재 지분 2.82%(시가 1000억여원어치)를 하이텍에 빌려준 것과 관련, 하이텍의 자금난이 심각한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온다. 현장과 시장의 이런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희망 보인다” vs “낙관 힘들다”

김 회장에게 반도체는 ‘25년 열정’이 묻은 사업이다. 중동 건설사업을 접은 뒤 동부는 1983년 미국 몬산토와 제휴해 반도체 소재(웨이퍼)를 생산하는 코실(현 실트론)을 세웠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김 회장은 “80년대 다른 기업들이 중동에서 번 돈으로 번듯한 사옥을 지을 때 우리는 반도체의 꿈을 키웠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6년 만에 코실 지분 51%를 LG에 넘기고 만다. 97년엔 동부전자를 세워 미국 IBM과 손잡고 2조원씩 돈을 대 256메가D램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가 외환위기로 포기하기도 했다. 이후 하이닉스반도체가 고전하는 것을 보고 김 회장은 파운드리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파운드리는 대만의 TSMC·UMC 등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동부가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00년 7월. 도시바와 기술계약을 하고 충북 음성 상우리 일대 100만㎡(약 30만 평) 부지를 사들여 7개 라인을 깔겠다는 계획 아래 대대적인 투자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동부가 반도체에 쏟아 부은 돈은 3조원가량. 그러나 2000년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 2002년 인수한 아남반도체 실적을 포함해 누적 적자가 1조5600억여원이나 된다. 동부전자와 아남반도체가 합병한 동부일렉트로닉스가 자본잠식에 빠지자 다시 종묘·비료 회사(동부한농)와 합쳐 동부하이텍을 만들었다. <그림 참조>

그래도 재무상태가 불안하다. 은행 빚이 2조원대, 1년 안에 갚아야 할 차입금·사채가 5000억원을 넘는다. 게다가 기술력도 ‘아직 멀었다’고 평가받는다. 한화증권 서도원 애널리스트는 “동부는 회로선폭 축소기술이 부족해 생산효율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전문가는 “파운드리는 ‘물량 떼기’ 장사인데 동부는 규모가 애매해 손익을 맞추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적게는 1조5000억원, 많게는 4조원을 추가 투자해 3~4개 라인을 더 갖춰야 동부가 수지를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다. 그룹 차원에서 돈 들어갈 곳이 쌓여 있다. 동부제강이 충남 아산만에 전기로 제철소를 짓는 중이고,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동부증권은 인수합병(M&A)할 증권사를 물색하는 중이다. 반도체 사업 확충에 필요한 조 단위의 ‘뭉칫돈’을 조달하기 힘들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이에 대해 그룹 측은 “지금은 불안감이 걷히고 있는 시기”라고 잘라 말한다. 자금 압박에서 완전히 탈출했다는 것이다.

동부하이텍이 산업은행 등에서 조달한 1조원대 신디케이트론이 문제였는데 지난달 5년 만기 연장을 받았다. 산업은행 기업금융실 강태구 팀장은 “외부 전문가 컨설팅 결과 동부하이텍은 충분히 생존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아 만기 연장을 해줬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다 동부화재 지분 매각(1600억원), 부동산 처분(299억원), 동부화재 지분 차입(1034억원) 등으로 4000억원대 자금을 확보했다. 동부하이텍에서 떼어낸 합금철 사업부문(동부메탈)을 팔아 수천억원대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파운드리 부문의 생산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독자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해 사업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전략도 세웠다. 위탁생산에서 벗어나 반도체 제조업체의 면모를 갖추겠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동부가 디스플레이구동칩(DDI)·이미지센서반도체(CIS) 등을 독자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것으로 평가한다. DDI는 휴대전화나 TV에 들어가는 화면의 화질을 조정해주는 고부가가치 부품이다. CIS는 빛을 전기신호로 바꿔주는 반도체로 주로 디지털카메라에 쓰인다. 오영환 동부하이텍 사장은 “유수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확대해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이텍 관계자는 “옛 한농의 사업부문이 유동성을 받쳐주면 반도체 사업은 2~3년 안에 정상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자신했다.
 
“개척정신” vs “시간 싸움”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김 회장의 집념은 ‘개척자 정신’으로 압축된다. 사업 초기 손아래 동서인 윤대근 동부하이텍 부회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비메모리는 선진국형 첨단 비즈니스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비메모리가 필요하지 않으냐. 비메모리에 헌신해 조국 선진화에 기여해야 한다. 만의 하나 실패하더라도 누군가 우리를 이어받아 성공시킨다면 나는 개척자로서 보람을 느낀다. 그러면 망해도 보람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반도체 사업이 본궤도에 이르기까지 TSMC는 8년, 삼성전자는 12년 걸렸다”고 강조한다. TSMC는 대만 정부의 전방위 지원을 받았고, 삼성도 계열사들이 화수분처럼 돈을 댔다. 정부 지원은 커녕 금융 계열사의 도움도 쉽지 않은 상태에서 동부가 악전고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버틸 자신이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반도체에 대한 사업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그동안 M&A에 소극적이었다. 2003년께 이명환 당시 그룹 부회장이 “반도체 투자에서 시간을 버는 방법으로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건의했지만 김 회장은 별 반응을 안 보였다고 한다. 2005년 골드먼삭스가 “(재무적 투자자로서) 돈은 얼마든지 대겠다. (M&A) 깃발을 들어달라”고 제시했을 때도 그의 대답은 “노(No)”였다. 오히려 김 회장은 “(비메모리라는) 새로운 산업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개척정신이 중요하다”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장의 시계’와 ‘김 회장의 시계’는 그 움직이는 속도가 달라 보인다.

지난해 3분기까지 동부하이텍 반도체부문은 1791억원 매출에 705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서도원 애널리스트는 “수익구조가 계속 불안하면 시장의 믿음이 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 역시 최근 들어 “굵직한 투자는 마무리 단계다. 이제는 성과를 거둘 차례”라는 말을 자주 강조하며 조만간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도가 ‘시장의 시계’보다는 더뎌 보인다.

여기서 김 회장 특유의 ‘60대(代) 대업론’도 음미해볼 대목이다. 그는 “50대는 넘어야 원숙한 경영을 할 수 있다. 60대 중반에서 70대에 큰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더라”며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말하는 ‘젊은 기업인’이다. 그의 나이는 이제 64세다. 60대 중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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