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자사(陶瓷史)시간이었다.
고려청자와 조선조 초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역시 조선조 백자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도예의 내력이 슬라이드와 복제품을 통해풀이되어 나간다.
길례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것은 분청사기다.
은은한 비색(翡色)의 자태와 섬세한 상감(象嵌)으로 귀태를 한껏 보여주는 청자나 푸른 듯 흰 달과 같은 백자도 아름답지만분청사기에는 살아 움직이듯 활달한 힘이 있어 특히 좋았다.
「분청사기」란 「분장청회사기(粉粧靑灰沙器)」의 준말이다.청자만들 때 쓰이는 회색이나 회흑색 질,즉 태토(胎土)의 표면을 백토로 분칠하고 나서 회청색 유약을 발라 구워 낸다.
15세기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세종.세조대를 거쳐 성종 때완성된 유형이다.
이들 분청사기 중에서도 길례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큰 연꽃 무늬 한 송이를 항아리 몸 가득히 새겨 그린 편병(扁甁)이다.
당당한 맵시와 자유분방한 붓놀림.
연푸른 회백색의 살결에는 온통 자잘한 금이 가 있다.「빙렬(氷裂)」이라 불리는 금.구워진 그릇이 식으면서 생기는 「식은 테」다.이 금에 끌리는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모란꽃 문양을 새긴 자라병도 매력적이다.
납작 엎드린 자라 모양의 둥근 병.자라머리 같은 주구(注口)가 병 한쪽 옆에 고개를 치키고 있다.전이 너부죽한 이 아가리는 야무지고 앙증맞다.
흡사 여인의 「육신」이다.
길례는 이따금 도자기골의 가마터를 찾곤 했다.
도자기가 구워지는 소성(燒成)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지루한 일상도 훨훨 타 버리는 것 같아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다.
가마에는 눈구멍이 있다.
소성상태를 살피는 이 시구(視口)에서 가마 안을 들여다보는 설렘.사랑의 비밀화원을 엿보는 기분이다.
산허리를 따라 길게 쌓아 올린 등요(登窯)의 가마 안은 진붉게 단풍이 든 산길처럼 투명하고 환하다.그 산길에 즐비하게 놓인 그릇들이 저마다 작은 태양처럼 빛을 토하며 1천3백도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솔바람이 계곡을 타고 가는 깊은 밤,이 시구가 밤 새워 보여준 준엄한 소성의 교훈을 잊을 수 없다.
「타되 타 버리지 않는」「녹되 녹아 버리지 않는」 치열한 과정.아프디 아픈 이 매무시 구이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도자기는탄생하는 것을….
사랑의 소성과정도 그런 것인가.
아득히 멀기만 하고 까무라치도록 아프기만한 사랑.
그러면서도 이를 데 없는 목숨과 같은 것.
길례는 멍하게 앉아 있었다.
자라병 슬라이드 화면에 자신의 자궁이 몸부림치며 포개지는 환각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