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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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도자사(陶瓷史)시간이었다.
고려청자와 조선조 초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역시 조선조 백자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도예의 내력이 슬라이드와 복제품을 통해풀이되어 나간다.
길례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것은 분청사기다.
은은한 비색(翡色)의 자태와 섬세한 상감(象嵌)으로 귀태를 한껏 보여주는 청자나 푸른 듯 흰 달과 같은 백자도 아름답지만분청사기에는 살아 움직이듯 활달한 힘이 있어 특히 좋았다.
「분청사기」란 「분장청회사기(粉粧靑灰沙器)」의 준말이다.청자만들 때 쓰이는 회색이나 회흑색 질,즉 태토(胎土)의 표면을 백토로 분칠하고 나서 회청색 유약을 발라 구워 낸다.
15세기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세종.세조대를 거쳐 성종 때완성된 유형이다.
이들 분청사기 중에서도 길례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큰 연꽃 무늬 한 송이를 항아리 몸 가득히 새겨 그린 편병(扁甁)이다.
당당한 맵시와 자유분방한 붓놀림.
연푸른 회백색의 살결에는 온통 자잘한 금이 가 있다.「빙렬(氷裂)」이라 불리는 금.구워진 그릇이 식으면서 생기는 「식은 테」다.이 금에 끌리는 것이다.
흐드러지게 핀 모란꽃 문양을 새긴 자라병도 매력적이다.
납작 엎드린 자라 모양의 둥근 병.자라머리 같은 주구(注口)가 병 한쪽 옆에 고개를 치키고 있다.전이 너부죽한 이 아가리는 야무지고 앙증맞다.
흡사 여인의 「육신」이다.
길례는 이따금 도자기골의 가마터를 찾곤 했다.
도자기가 구워지는 소성(燒成)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지루한 일상도 훨훨 타 버리는 것 같아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다.
가마에는 눈구멍이 있다.
소성상태를 살피는 이 시구(視口)에서 가마 안을 들여다보는 설렘.사랑의 비밀화원을 엿보는 기분이다.
산허리를 따라 길게 쌓아 올린 등요(登窯)의 가마 안은 진붉게 단풍이 든 산길처럼 투명하고 환하다.그 산길에 즐비하게 놓인 그릇들이 저마다 작은 태양처럼 빛을 토하며 1천3백도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솔바람이 계곡을 타고 가는 깊은 밤,이 시구가 밤 새워 보여준 준엄한 소성의 교훈을 잊을 수 없다.
「타되 타 버리지 않는」「녹되 녹아 버리지 않는」 치열한 과정.아프디 아픈 이 매무시 구이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도자기는탄생하는 것을….
사랑의 소성과정도 그런 것인가.
아득히 멀기만 하고 까무라치도록 아프기만한 사랑.
그러면서도 이를 데 없는 목숨과 같은 것.
길례는 멍하게 앉아 있었다.
자라병 슬라이드 화면에 자신의 자궁이 몸부림치며 포개지는 환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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