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설득 잘하는 대통령이 유능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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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지만 이번의 충돌이 불러올 파장보다도 필자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이번 대립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 대통령제의 야누스적 딜레마다. 사실 새로이 떠오르는 강력한 권력으로서의 이명박 당선인과 레임덕의 끝자락에 서 있는 노 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직이 보여주는 지극히 이중적인 두 얼굴이다. 임기 초반 한국의 대통령은 엄청난 권력을 보유한 제왕적 대통령에 가깝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임기 18개월만 지나면 국민 지지도는 50%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역대 대통령들은 이때부터 임기의 절반 이상을 레임덕의 수렁 속에서 헤매 왔다.

탈권위를 내세우며 당권과 대권의 분리를 실천했던 노 대통령은 임기 첫해부터 여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닥쳐, 이라크에 3000명의 군대를 파병하는 데에 1년 이상의 시간을 소비했다. 또한 임기 초반 90%의 지지를 호령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주변 인물들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임기 후반 2년을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서 지냈고, 그 사이에 우리는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렸었다.

이제라도 대통령제를 정상화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접근을 생각해 봐야 한다. 첫째, 임기 초반의 제왕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통령 스스로가 대통령직에 대한 이해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들이 임기 초반에 빠지기 쉬운 ‘역사 바로 세우기’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어느 나라든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들은 지나온 과거를 부정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와 역사를 구축하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사업의 이름은 제 각각이었지만,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모두 이러한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유혹의 함정에 빠졌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을 벌여가는 과정에서 대통령들은 엄청난 권력자원을 필요로 하게 되고 점차 제왕적 대통령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결국 대통령 스스로가 임기 중의 목표를 현실에 맞게 다운사이징(downsizing)하게 될 때, 제왕적 대통령의 유혹은 자연스럽게 통제된다.

둘째, 갈수록 장기화되고 있는 레임덕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제도의 변경이 아니라 인식과 행동의 전환이다. 오랜 세월 제왕적 대통령에 시달려온 우리는 지난 20년간 대통령에 대한 제도적 견제를 꾸준하게 강화해 왔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지나친 제도적 견제의 강화가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하고 장기화하는 문제들을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과연 그럴까?

레임덕의 장기화를 제도적 견제의 강화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선진적 민주사회라면 견제의 틀 속에서도 대통령이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꾸준한 협상을 통해 통치력을 확보하는 대통령이다. 야당뿐 아니라 자신이 소속한 정당 의원들과도 꾸준히 대화하고 협상하면서 자신의 정책 대안을 밀고 나갈 수 있는 대통령이 요구된다. 예컨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세계화의 대세이니 나를 따르라고 단순히 주장하기보다는, 다양한 농민단체·이익단체들과 끝없이 협상하고 국회 내 비준 반대파 의원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대통령이 유능한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유능함은 곧 설득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뉴스타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20년을 유지해 온 대통령제는 이제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제도의 변경보다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돼야 한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