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명품, ‘두 토끼’ 마케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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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프랑스 파리의 쇼핑 중심가인 포부르 생토노레에 있는 에르메르 본점 안쪽 유리장에는 버킨백이 진열돼 있다. 악어 가죽으로 만들고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이 핸드백의 가격은 11만200유로(약 1억5450만원). 점원에게 가방을 꺼내 보여달라고 하자 “보여줄 수는 있지만, 이미 예약된 상품이어서 팔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 비싼 22만 유로짜리도 한 달에 두세 개 정도는 팔린다고 한다.

명품을 주로 취급하는 파리 봉마르셰 백화점 보스 매장에 가면 요즘 500유로(약 70만원)가 채 안 되는 코트를 살 수 있다. 세일 막바지에는 이곳에서 300유로에도 그럴듯한 점퍼를 건질 수 있다. 명품의 양극화 현상이다. 유럽 명품업체들이 세계 최고 부자들을 겨냥한 최상급 명품과 중상류층용 명품을 차별화해 만들면서 고속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부자 마케팅=명품 일번지인 프랑스 업체들은 지난해 최악의 조건에서 장사를 했다. 유로가 천정부지로 뛰면서 단가가 크게 올랐다. 특히 주요 고객인 미국과 일본의 달러화·엔화의 약세는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세계적인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구매력도 크게 저하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세계적인 경제연구소들이 모두 명품 업계의 쇠락을 예상했지만 정반대였다. 세계 최고의 명품 그룹인 프랑스 LVMH의 경우 지난해 1∼9월 매출이 전년도에 비해 10% 가까이 늘었다. 고객층이 한정된 명품 업체의 매출이 10%씩 오른다는 것은 대단한 성공에 속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고가인 시계·보석류는 22%나 성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구매력은 주춤했지만, 최고가 명품을 찾는 백만장자들의 구매 욕구는 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르메스의 경우 3000만원대 버킨백은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이다. 이 업체 관계자는 “최근 러시아와 중국 부자들이 고가 상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전했다. 명품 중의 명품을 원하는 부자 고객을 위해 1만 유로(약 1400만원)짜리 재킷부터 30만 유로(약 4억2000만원)짜리 웨딩드레스까지 최고급 명품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하청 생산 확대=유럽 백화점에 진열된 명품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이나 동유럽 제품이다. 생산비 절감을 위해서다. 프랑스의 라코스테가 일찌감치 중국에 공장을 차린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영국의 버버리와 독일의 휴고보스 등 유럽 각국의 대표 브랜드업체들이 모두 중국이나 동유럽에서 살길을 찾고 있다.

명품 가방의 대명사격인 루이뷔통 역시 비교적 인건비가 싼 스페인에서 생산한 것이 성공하면서 이제는 본격적인 하청 생산에 나섰다. 신발의 경우 상당량을 인도 공장에서 만들 계획이다. 최고 상류층의 경우 아무리 값이 비싸도 ‘메이드 인 유럽’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지만 중상류층의 경우 가격이 너무 오르면 구매 의욕을 잃기 때문이다. 프랑스 낭시비즈니스 스쿨의 코로미슬로프 교수는 인터넷 기고문에서 “러시아산 캐비아나 독일산 자동차와는 달리 프랑스산 의류 등의 명품은 하청을 해도 품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업체들이 하청 생산을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중·러 부자들, 돈 쓰려고 줄 서있다”
명품 전문가 슈발리에 교수

세계적인 명품 전문가 미셸 슈발리에 교수는 전화 인터뷰에서 “명품 업계가 약진할 수 있는 배경은 고객들의 이동 추이를 잘 분석한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파리 럭셔리 마케팅 연구소에 재직 중이며 HEC와 ESSEC 등 명문 경영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의 저서 『럭셔리 브랜드 경영』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서가 출간됐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 속에서도 명품 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비결은.
 
“전통적인 고객층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 등의 신흥 부호들이 늘어난 게 도움이 됐다. 명품 업체들은 이들의 구매력을 자극할 수 있는 최고가 상품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생산 공장을 중국 등 인건비가 싼 지역으로 돌려 원가를 낮춘 것도 적절한 선택이었다.”
 
-하청 생산의 경우 상품의 질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명품 업체의 하청은 더 이상 터부가 아니다. 현실이다. 업체들이 하청 생산을 하면서 철저하게 지도·감독을 하기 때문에 질 저하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특히 동유럽 생산품은 서유럽에서 만드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앞으로 명품 업계의 전망은.
 
“향후 10년 내에 명품의 절반 이상이 비유럽권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고가 상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전량을 모두 하청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청 생산을 계속 늘릴 경우 유럽이 계속해서 명품 시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가.
 
“프랑스·이탈리아·영국 등은 수백년 동안 쌓아온 노하우가 있다. 이것이 생산지를 따라 하루아침에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파리=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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