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률 352대 1, 입법고시 돌풍의 원인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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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12면

지난해 6월 국회 환경노동위 소속 의원들이 반환받은 경기도 파주 미군 기지를 찾아 포클레인으로 땅을 판 뒤 토양 오염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입법조사관들은 이런 현장 조사에도 의정지원 차원에서 동행한다. [연합뉴스]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의 ‘퀴즈 쇼(Quiz Show)’.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배경은 1950년대. TV 퀴즈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승부를 조작하는 프로그램 제작자와 방송사, 광고주의 야합을 그렸다. 흑막을 파헤치고 관련자들을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는 역할은 의회조사관이 한다. 미국에서 의회조사관의 활동이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 다뤄져온 것과 달리, 우리 국회의 ‘입법조사관’은 생소하게 느껴진다. 국회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실, 국정감사장 등 국회의원이 있는 곳이면 이들은 어디에든 있지만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뒷바라지를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점에서 방송사 스태프와 비슷하다.

승진 빠르고 소리 없이 국가 움직이는 매력

국회 법제실 박수철 과장(가운데) 등 법제조정과 법제관들이 의원실에서 검토 의뢰한 법률안 내용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국회사무처 제공]

입법조사관의 등용문인 입법고시가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2년에 한 번 실시되던 시험이 2000년부터 매년 치러지면서다. 최근에는 행정고시의 인기를 뛰어넘기도 한다. 2006년도 입법고시와 행정고시에 동시 합격한 3명이 전원 국회를 택했다. 국회사무처 서덕교 고시계장은 “요즘에는 입법고시에 붙으면 행시는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변호사와 회계사, 박사급 전문인력 특별채용에도 지원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국회의 위상 변화가 꼽힌다. 과거처럼 행정부가 독주하는 시대는 지났다. 국회의 입법과 감시·견제 기능이 강조되고 있다. 국회에서 처리된 법률안이 14대 760건에서 15대 1544건, 16대 1659건, 17대 3685건으로 급증했다. 17대에 가결된 정부 발의 법안 495건 가운데 77%(383건)가 국회에서 수정돼 통과됐다. 국정의 중심이 국회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의 직업취향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 지동하 조사관은 “일반 행정부처가 갖는 힘은 없는 대신 민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젊은
세대에겐 매력 포인트로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 덩치가 행정부보다 작은 대신 승진 등 실리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다.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하는 기간이 행정부에 비해 평균 2년 정도 짧고, 차관보급 자리가 각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을 포함해 18개에 이른다. 해외 유학이나 연수를 나갈 수 있는 기회도 더 많다.

다만 여야가 힘 겨루기를 하는 정치권 한복판에 있는 만큼 총선 결과 등에 따른 ‘인사 외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04년 총선 후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이 물러난 데 대해 “대통령 탄핵 때 김기춘 법사위원장의 사회를 도왔다는 이유로 보직 해임된 것”이란 ‘보복 인사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누구라도 했어야 했던 일”이라면서도 구체적인 언급을 꺼렸다. 1차 고객인 의원들에 대한 지원에 주력하다 보니 ‘업무 자세가 뻣뻣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입법=올 2월부터 시행되는 ‘휴면예금관리재단의 설립 등에 관한 법률’. 이 법안은 “은행에서 잠자고 있는 휴면예금을 저소득층 지원에 쓸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마련하고 싶다”는 남경필 의원의 의뢰에서 시작됐다. 법제실은 법안의 목적과 용어 정의, 재단설립 절차, 복지사업 지원근거 등 법 체계를 짜나갔다. 법안은 지난해 7월 국회를 통과했다. 그 결과 휴면예금을 활용해 저소득층에 보증 없이 소액 신용대출을 해줄 수 있게 됐다. 의원의 머릿속에 있던 아이디어가 법제관들의 손길을 거쳐 현실화한 것이다. 박수철 법제조정과장은 “다른 법률에 유사 규정이 있는지, 위헌 소지가 없는지 등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며 “이슈가 되고 있을 때 법안이 제출돼야 한다는 점에서 항상 시간이 촉박한 편”이라고 했다.

법안 심의=올 10월 시행될 예정인 일명 ‘성폭행범 전자팔찌법’. 박세환 의원이 법안을 제출하고, 법무부에서 수정 의견안을 냈을 때만 해도 법 시행 전에 성폭행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어떻게 할지에 관한 ‘경과 조치’ 조항이 없었다. 법사위 조사관들의 지적에 따라 ‘과거 성폭력 범죄로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았거나 성폭력 습벽이 인정되는 경우’까지 전자팔찌를 채울 수 있게 됐다.

법사위에선 다른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에 대한 최종 검토 업무도 맡는다. 법사위 손호철 조사관은 “조사 하나에 따라 법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법 조문을 하나하나 뜯어본다”고 했다. 예를 들어 법 적용 대상에 ‘등(等)’자 하나만 들어가도 대상 범위가 확대돼버린다. 각각 다른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거나, 인용하는 법조문이 다른 경우도 있다. 변호사 특채로 국회에 들어온 김석순 조사관은 “내 손으로 바로잡은 법률이 법전에 실리는 것을 보면 느낌이 새롭다”고 했다.

예산 심의=올해 예산에 포함된 농림부 ‘경영이양직불’ 사업비. 당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는 지난해보다 252억원 늘어난 365억원으로 돼 있었다. 나이 많은 농민이 은퇴하면서 농지를 젊은 농업인에게 팔 경우 지급하는 보조금을 대폭 확대한 것. 명분은 ‘한·미 FTA 대책’이었다. 이 예산은 국회를 통과하면서 65억원이 삭감됐다. 예결위 의원들이 “FTA 비준안 통과와 발효 시기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224%나 증액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예결위 검토보고 내용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지적을 하기 위해선 매년 3월 각 부처가 기획예산처에 다음 해 예산 자료를 낼 때부터 예비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조사관 16명이 사람당 150~200개에 달하는 사업설명서를 일일이 읽어보고, 해당 기관에 추가 자료를 요구한다. 김사우 조사관은 “자료를 요구할 때는 담당자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다양한 전략·전술을 쓰곤 한다”며 “각 부처가 자기 분야만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제3자의 시각을 불어넣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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