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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일본서 읊어진 고대 노래집에 「만엽집」(萬葉集)이라는 책이있어요. 20권으로 돼있는데,자그마치 4천5백16수의 노래가 모아져 있지요.
한자로 쓰여 있지만 한시(漢詩)는 아니고…고대의 말을 한자로표기한 우리 신라향가(新羅鄕歌) 같은 노래라 할 수 있어요.
주로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당시의 일본을 주름잡던 우리 조상들에 의해 읊어진 노랜데,여기에 이중 삼중의 뜻을 담은 작품이 많다는 거예요.』 서을희여사는 큼직한 핸드백에서 메모지를꺼내 적어가며 설명한다.
이를테면 「자자」(紫者)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다.
「자」(紫)는「보랏빛」을 가리키는 한자인 동시에 보라물감의 원료가 되는 「지치」 즉 「자초」(紫草)의 풀뿌리도 뜻한다.
그래서 이「자자」두 자를 한문식으로 읽으면 「보라빛깔은…」과「지치는…」을 의미하는 말마디가 된다.그런데 「자자」라는 음독(音讀)소리를 그대로 우리말에 옮기면 어떻게 될까.「자자」,즉「동침하자」는 말소리가 된다.
이를 이용하여 작자는 이중의 뜻으로 노래를 읊었다.겉보기에는「보라물들이는」 내용이지만 실은 「섹스하자」는 음사(淫詞)인 것이다. 그뿐 아니다.음사인 척하면서,그 속으로 암호와 같은 정치적인 노래까지 읊고 있다.방자한 왜왕과 왕자들을 비판한 노래다.아마도 이것이 「본노래」아니겠는가.
보라색은 일본말로 「무라사키」(むらさき)다.이 「무라사키」발음을 우리 옛말에 대입(代入)해보자.「무라」는 「무리」의 옛말이고,「사키」는 「새끼」의 옛말과 소리가 흡사하다.
노래의 작자는 「무라사키」란 말로 「무리 새끼」,즉「새끼들」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 무렵의 일본 왕족들은 백제나 신라 왕족처럼 보랏빛 옷을 입었다.보라는 최고위층 사람들을 상징하는 당색(當色)이었다.당색이란 고위관료 각 계급에 해당되는 빛깔을 말한다.
그러니까 「보라 자(紫)」 단 한자로 「지치」와 「동침」과 「(보라옷을 입고있는)왕자 무리들」 세가지를 한꺼번에 나타낸 것이다.고도의 노래 기법이다.
『백제때 노래인 「정읍사」도 길례씨가 지적한 것처럼 이중 삼중의 뜻을 담아 읊은 노래인지도 모르겠네요.
「정읍사」가 백제 말께 읊어진 노래라면 「만엽집」과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고,당시 백제 지식인들이 엄청나게 많이일본에 건너가 나라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노래기법도고스란히 일본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어 요?』 『백제 뿐이겠습니까?고구려 신라 가야 사람들도 오랜 세월에 걸쳐 엄청나게 왜로 건너갔지요.』 아리영 아버지가 약주잔을 서여사에게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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