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57. 1970년대 유럽<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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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0년대 국악인들과 함께 다시 유럽에 갔을 때 독일 본 시청 앞 광장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정재국(피리), 필자, 오정숙(판소리), 김동준(북).

유럽 연주에서 가장 인상적인것은 청중이었다. 소설 『25시』의 작가 C.V. 게오르규가 나의 마지막 연주 장소인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 청중으로 찾아왔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파리에 살았던 그는 영어를 전혀 쓰지 않고 프랑스어만 사용해서 한국대사관의 문정관이 그의 말을 통역해주었는데 나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했다. 특히 ‘침향무’라는 곡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피란 시절인 1951년 그의 소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나는 이 작가가 내 연주를 들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그가 한국 문화에 유독 관심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가장 신비스러웠던 도시는베네치아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가 끝난 다음날 푸르스름한 새벽에 기차를 탔다. 기차로 하루 종일 남쪽으로 내려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까지 가는 동안 나는 유럽의 춘하추동 경치를 다 볼 수 있었다.

어느 곳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가 하면 또 다른 지역의 호수에서는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있었다. 오후 6시쯤 베네치아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베네치아에서는 배를 버스나 택시처럼 타는 것도 예상치 못했던 경험이었다. 우리 짐은 모두 지게꾼 같은 사람이 옮겼다. 그가 짐을 전부 묶어 등에 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와 생활 패턴이 다른 베네치아에서는 연주회가 오후 11시나 돼야 시작했다. 가야금을 들고 호텔을 나오면 물로 가득한 도시의 다리를 건너 꼬불꼬불한 길을 계속 걸어야 했다. ‘그야말로 물골목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 귀족의 집이었던 연주회장에 온 이탈리아 어린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가야금 연주 모습을 보던 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서양 악기가 들어왔을 때 우리 표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연주 도중 창 밖에서는 곤돌라 뱃사공의 노 젓는 소리가 “삐걱, 삐걱” 났다. 문화가 경계선 없이흐르는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연주는 두 시간 지난 다음날 오전 1시쯤에서야 끝났다. 다시 물만 가득한 정적의 도시를 가로질러 호텔로 돌아와 누우니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가야금 하나를 끼고 걷던 길에서 짙은 밤안개 사이로 깜박거리던 가로등, 출렁출렁하던 물소리, 유난히 꼬불꼬불하던 골목길만 아른거렸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 내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무원에게 의례적으로 급행료 조의 돈을 줘야 했던 나라, 몇 년 전까지 변변한 수출품 하나 없다가 여인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을 팔았던 나라에서 온 나였다.

지구상에 이런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 봐야 할 만큼 신비로운 곳이 베네치아였다. 그리고 이처럼 상상 속 나라와 같은 곳의 청중이 가야금 선율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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