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斗山 李東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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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87년 2월10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선 두산(斗山)이동화(李東華)翁의 80회 생일잔치가 열렸다.이날 모임은 한국 정치학계 원로이자 혁신계(革新系)거목인 두산의 업적과 인격을 추앙하는 동지.후학들이 마련했다.
시인 구상(具常)은『어둠과 격동의 세월속에서 모진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지성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 두산』이라는 두산송(頌)을 낭독했다.또 그의 일대기(一代記)『이동화평전』이 봉정(奉呈)됐다.
1907년 평남(平南)강동(江東)에서 태어난 두산은 29년 일본 도쿄(東京)大 정치학과에 입학했다.당시 일본엔 진보주의 물결이 넘치고 있었고,특히 정치학과 교수들은 거의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두산도 이들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 에 심취,마르크스.레닌의저작(著作)들을 섭렵했다.
36년 졸업과 함께 귀국해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주의 연구 독서회를 조직했다가 1년여 옥고(獄苦)를 치렀다. 해방후 두산은 여운형(呂運亨)이 이끈 건준(建準)에 참여했다가 美군정이 수립되자 북으로 갔다.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이 세운「평양민보」주필로 일하면서 김일성(金日成)대학에서도 강의를 맡았다.그러나 조만식이 김일성 일파에 의해 제거 되면서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김일성 공산체제에 환멸을 느낀 두산은 민주사회주의자로 변신했으며 50년10월 북진(北進)한 국군을 따라 남하했다.그후 육군본부에서 문관으로 일했고 이어 경북대.성균관대 교수를 역임했다. 57년 두산은 자신의 이상인 민주사회주의를 현실정치에서 실현하기 위해 대학강단을 떠났다.숱한 시련이 뒤따랐다.58년 진보당사건으로 투옥,4.19후 사회대중당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실패,5.16후 혁신계 일제검거로 구속됐다.두 차례 옥고를 치른 뒤 두산의 정치활동은 크게 위축됐으나 혁신계 대부(代父)로서 그의 위치는 흔들림이 없었다.
80회 생일을 기념한 신문 인터뷰에서 두산은 스스로를「실패한정치인」이라고 부르면서『하지만 그 시대 양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10일 저녁 두산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향년 89세.삼가 명복(冥福)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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