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정읍사(井邑詞) ○7 미술관 앞 주차장엔 까만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기사가 내려와 뒷자리 문을 얼른 열었다.등록을 하러 가던 날 새벽,맨 앞자리에 서 있던 그 청년이다.
『언제 한번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노신사는 두 여성이탄 차를 떠나 보내고 나서야 자기 차에 올랐다.서여사는 은회색중형차를 손수 몰고 다닌다.
『멋쟁이 아버님이시군요.』 길례는 백미러에 비치는 아버지와 딸의 모습을 멀거니 지켜봤다.노신사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아리영의 등을 감싸 먼저 차에 태우고 있다.
저렇게 부드럽고 세련된 몸짓으로 딸이건 아내를 대하는 남자는처음 본다.길례의 남편이 차 도어를 열 때는 오직 자기 자신이탈 경우뿐이다.
잠자리에서도 대충 그랬다.자기가 원할 때 별안간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전희(前戱)고 후희(後戱)고 그런 테크닉과는 아예 담싼 사나이다.혼자 돌진하듯 연소하고는 간단히 거둠질한다.
곤충성 생리.
길례는 남편의 행태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벌.나비들이 홀연히꽃판으로 다가가 꽃심의 꿀을 마시고는 곧장 날아가 버리는 모양새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그나마도,이제 밤 생활은 낡은 필름의 한토막처럼 아슴푸레할 뿐이다. 『해외공관에 오래 나가 계셨었대요.유럽 쪽에서 경제담당 공사까지 지내신 분인데 정년퇴직하고 현재는 농장 경영중이래요.아리영씨 부군인 사위가 주로 실무를 맡고 있나봐요.부인은 몇해 전에 돌아가셨고….』 『소상하게도 아시네요.』 『아리영씨가 일러 주더군요.』 서여사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출판사 아사달은 삼청동 한옥에 자리잡고 있었다.안채만 빼고,내부는 모두 양식으로 꾸며진 사무실이다.
안채로 안내받았다.
귀틀을 반뜻하게 맞추어 깐 우물마루 대청이 널찍하다.
안방은 온돌방이다.새로 깐 장판에 생콩기름을 먹였는지,아릿한콩내가 풍기는 바닥은 깔끔하고 따스했다.서여사의 응접실겸 집무실이다. 튼실한 흑단목 탁자 위에 분청사발 몇개가 포개져 있고,다기(茶器)가 얌전히 놓여있다.
『모과차와 대추차 녹차.뭘 드시겠어요? 모과와 대추는 이 마당 안에서 농사지은 거예요.』 담장 가에 모과나무랑 대추나무 여러 그루가 보였다.
대청마루 뒤뜨락은 꽃다운 타일을 발라 모양낸 예대로의 어루화초담으로 둘러쳐져 있다.오리알같이 반들거리는 장독도 보인다.
『다녀오셨습니까?』 서여사 아들이 마당을 건너와 마루앞 지대돌 위에서 인사했다.캐시미어 반코트의 사나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