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52. 배고픈 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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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장 인간문화재 고흥곤씨가 제작한 필자의 가야금. 영화음악을 연주할 때는 이 악기를 쓴다.

왜 배고픈 예술이 더 아름다울까. 이 알 듯 말 듯 한 진리를 실제로 체험한 적이 있다. “가야금이라는 악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문화영화를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황 선생이 음악을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1960년대 초 이러한 제안을 한 사람은 영화감독 이정실씨였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문화공보부 산하 국립영화제작소. 지금은 작고한 이 감독은 상당한 영화적 감각을 가진 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런 감독들이 문화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은 국립영화제작소뿐이었다. 나는 이미 50년대에 ‘억지 봉잡이’라는 영화에 배경음악을 입혀본 경험이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했다.

60년대에는 모두가 가난했다. 먹고 입을 것도 없던 때였다. 그러니 영화 필름은 금이었다. 필름을 조금 써 영화를 만들면 실력 있는 감독으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이 감독은 영화를 찍으면서도 필름을 아끼느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예산도 너무나 적었다. 그런데 이 영화 제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 도쿄 아시아영화제에 출품하는 것이었다.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필름은 일단 해외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보내졌고, 영화제에도 출품됐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인기도 좋았다. 여기저기에서 보내 달라고 하는 바람에 원본필름이 거의 걸레 조각처럼 됐다. 복사를 너무 많이 해줬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여유가 생겼으니 예산을 대폭 늘려주겠네.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보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이 감독과 나에게 다시 제안한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크게 늘어난 예산 덕분에 우리 형편은 좋아졌다. 중간에 춤 장면을 훨씬 늘려서 집어넣고, 김매자 선생 등 최고 춤꾼들이 출연한 군무까지 곁들였다.

촬영 장소도 여러 곳으로 늘렸다. 아주 세세한 장면까지 들어가 작품성도 높아졌다. 다시 말해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이 감독과 나는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만든 것 같다”며 만족했다. 제목은 처음 것과 마찬가지로 ‘가야금’이라 붙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해외 공관에 이 필름을 모두 보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다시 틀어 달라는 얘기도,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는 품평도 없었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작품이 돼버린 것이다. 풍부한 자금과 자원을 들여 만든 영화가 반드시 뛰어난 예술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다.

그리고 만든 사람이 만족했다고 해서 영화가 인기를 얻는 것도 아니었다. 예술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더욱 높은 완성도를 띄게 되는지도 모른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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