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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연애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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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함석헌이 누구인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평화운동가이자 사상가 아닌가. 그의 ‘씨알철학’을 담은 역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원고가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감명과 용기를 준다. 잡지 『씨알의 소리』는 70년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보루 역할을 했다. 고결하고 근엄한 함석헌 선생이 연애편지를 썼다니, 더구나 편지가 남아 있다니. 참 신선하게 들렸다. 그러나 함 선생을 기리는 모임에서는 편지 공개를 꺼리고 있다고 한다. 고인에게 누가 될까 봐서라는 것이다. 내게 소식을 전해 준 이는 “연애편지의 존재를 알리는 것 자체가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번역돼 나온 『D에게 보낸 편지』를 재미있게, 한편으로 숙연한 마음으로 읽었다. 지은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신좌파 사상가이자 노동이론가·생태주의자였던 앙드레 고르. 불치병에 걸려 23년째 고생하는 아내에게 바친 책이다. 책은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판됐고, 고르는 올해 9월 22일 60년간 생을 함께한 아내와 동반자살했다. 그런데도 책 내용은 매우 솔직·담담하고 때로 유쾌하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현실과 상상이 기적처럼 맞아떨어져, 난 살아 있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처럼 약간 야한 대목도 있다. 함석헌 선생 같은 대사상가라면 연애편지도 분명 범상치 않을 것이다. 설혹 사내의 춘정(春情) 한 자락이나 달떠 있는 소년 같은 열기가 편지에 투영돼 있다 해도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풍성하게 하면 했지 훼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위인들은 너무 근엄하고 완벽하다. 백범 김구도 그렇다. 백범 연구가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백범이 10만원권 지폐의 초상 인물로 결정돼 반갑다”며 “다만, 그의 어록을 교조적이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신화화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 동아시아를 격동시킨 이봉창 의사를 보자. 백범에게 “지난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다”고 고백할 정도로 한량 기질이 다분한 사나이였다. 백범이 준 거사 자금 300원을 일본에서 유흥비로 탕진하고 다시 200원을 송금받을 정도였다. 일본인 애인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범과의 약속대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이 의사의 이런 면모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색, 계’ 못지않은 수작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일반인에게 이봉창 의사는 평생 독립운동 의지만 불태운 초인으로 각인돼 있다.

위인뿐 아니다. 현 시대 정치인이나 관·재계 인사들도 너무 완벽하다. 아니, 완벽하게 비치려 한다. 생애를 제대로 정리한 기업체 오너의 자서전이 어디 한 권이라도 있을까. 요즘 같은 정권교체기엔 특히 정치인의 목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난리를 떤 ‘제2의 건국’ 구호를 지금 누가 기억이라도 하나. 노무현 정부도 과거사 청산이니 민족정기니 법석이었다. 뜻은 좋은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탓에 속된 말로 ‘자뻑’ 사태가 줄을 이었다. 집권 세력이 철 지난 운동권 논리와 거대 담론에 매몰돼 국민의 생생한 일상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민족정기도 섹스가 있어야 계승되는 법이다). 제발 새 정부만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부인 양 위세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과 세상을 다양한 눈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그야말로 실용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삶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 정책들을 폈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