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기자의헬로파워맨] 자신을 낮춰 정상에 오른 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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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을 마감하며 따져보니 ‘헬로 파워맨’ 이 20회를 기록했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스타를 통해 우리 시대의 감성과 상상력을 읽어보려는 시도였습니다. 그 스타들의 면면에서 올 대중문화계 지형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파워맨들의 인간적 매력에 압도되기도 했습니다. 이 ‘매력’이 이미지 시대의 최고 권력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달변에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그저 말솜씨가 빼어난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감성에 깊이가 있고, 그저 친절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리마다 최선을 다하는 프로페셔널이라는 뜻입니다. 지면에 못다한 얘기를 풀어봅니다. 첫 주자는 박찬욱 감독이었습니다. 홍콩영화제에서 돌아오는 그를 우격다짐으로 끌어냈습니다. 박 감독이라면 화술과 필력으로 익히 알려진, 최고의 인터뷰 대상입니다. 자신이 교정된 왼손잡이라고 털어놓으며 모범시민의 반듯한 일상이 지겨워 끔찍하고 폭력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박 감독은 자신에게 없는 것으로 ‘긴장하고 떠는 것, 승부욕’을 꼽기도 했습니다. 승부 경기에는 관심이 없어 평생 응원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는 “왜 남이 이긴 경기를 제 일처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이런 자기 중심성(다른 말로 자기 확신)과 독특함이 파워맨들의 특징 같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고집스러운 배우 강동원은 “나에 대한 대중의 기대에 끝까지 저항하고픈 욕심이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김기덕 감독은 뜻밖에도 자신의 집을 보여주었습니다. 딸 이름을 딴 ‘**네’라는 문패가 달린 사랑스러운 2층집, 거실 중앙 벽에 달린 그리스도 성화가 와르르 선입견을 무너뜨렸습니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오해와 풍문에 지친 그가 작정하고 문을 열어젖힌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가장 많이 나눈 얘기도 의외로 환경문제였습니다. 아이들 먹거리 걱정을 많이 했지요. 모든 부모는 똑같다, 앞으로 그의 영화는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많은 파워맨들, 특히 여성들은 강하고 긍정적인 어머니를 인생 최고의 자산으로 꼽았습니다. 검약을 몸소 보여준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장의 어머니,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도록 해준 김윤진과 이금희의 어머니, “사업가 어머니와 한량 아버지”를 둔 박해미의 어머니는 여장부의 롤 모델이 된 듯합니다.

 김윤진과 이금희는 가장 소탈한 인터뷰 상대였습니다. 김윤진은 저조차 당황한, 인터뷰 장소의 몇 가지 잡음에도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월드스타’라는 선민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죠. 이금희 역시 방송에서의 인간적인 이미지 그대로였습니다. 스스로를 낮춰야 높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산가족상봉 방송 때 할머니 앞에 무릎 꿇고 인터뷰하던 때를 떠올리다가는 눈물을 주룩 흘리는 여린 면모도 보였습니다.

 제가 본 또 다른 스타의 눈물은 김혜수입니다. 흥행에 족족 실패하고 연기력의 한계를 느껴 은퇴를 고심하던 시절을 회상하던 중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습니다. 이런 감성적 예민함, 뛰어난 공감능력, 솔직함이 대중스타의 조건 아닐까요.
 김혜수와 황정민·김명민·송강호는 자기 연기에 대한 분석적 인터뷰로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연기를 잘하는 것과 그것을 언어화·객관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이들은 우리가 오직 추측할 뿐인 ‘연기자의 내면’을 깊숙이 끄집어 보여주었습니다. 그저 ‘진심을 담아 연기한다’는 판박이 코멘트와 다른, 진중한 정신세계가 느껴졌습니다.

 말 하면 박진영도 빼놓을 수 없지요. 혼자만 듣기 아까운 ‘성공학’ 강의 같았으니까요.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장악한 유대인에 대해서는 “고함치며 싸우다가도 반드시 결론을 내고 헤어진다.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박진영은 인터뷰 도중 외려 제게 질문도 했는데요, 인터뷰 와중에도 상대를 분석할 정도로 여유 있고 명민한 인물이라 느꼈습니다.

 최고령이자 가장 우아한 상대는 앙드레 김이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그를 빼닮은 크고 화려한 난(蘭) 화분이 배달돼 왔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소문난 난 화분입니다. 제 귀에는 잘 들리지도 않는 음악소리를 못 견뎌 한 이승철도 생각나네요. “소리가 너무 또렷하고 크게 들려 피곤하다”며 문을 닫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런 게 타고난 민감성이라는 것이겠죠.

화제작 ‘밀양’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이고도 수더분한 인터뷰를 해준 전도연은 포장하지 않는 꾸밈없음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필 인터뷰 시기가 학력 위조 파문 때와 겹쳐 마음고생이 심했을 만화가 이현세씨에게 심심한 유감의 말씀을 전합니다. 귀한 시간을 선뜻 내준 모든 파워맨께 감사드립니다. 파워맨과의 만남은 내년에도 계속됩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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