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배우 멜 깁슨 名감독으로 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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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20대에 이미 돈과 명예, 대중의 환호에 파묻혀 속세가 제공하는 유토피아의 정점에서 살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전혀 평안하지 않았다. 술과 마약, 도박에 빠져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삶은 나에게 지루했고 별 의미가 없었다. 고층 빌딩의 창밖을 내다보며 내가 왜 여기서 뛰어내리면 안 되는 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할리우드의 대형 스타 멜 깁슨(48). '리셀 웨폰''브레이브 하트''랜섬' 등에서 선 굵은 남성적인 풍모로 수많은 팬을 거느린 그에게도 남모를 회한과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극심한 '정신적 파탄' 상태에 빠져 있던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안정을 얻게 된다.

깁슨은 지난 17일 밤 (현지시간) 미국 ABC방송에 출연해 명앵커 다이앤 소여와 가진 한시간 동안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와 그 탈출의 과정을 처음으로 소상히 밝혔다. 그가 대중 앞에서 부끄러운 시간들을 털어놓은 건 신앙 간증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미국 사회가 온통 논란에 휩싸여 있는 영화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에 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수난'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반유대적이라는 이유로 제작 포기 압력을 받았다. 영화는 예수가 죽기 전 12시간 동안 겪은 고초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깁슨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건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 때문이라고 지목했다. 이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 영화가 반유대적이라며 제작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처음부터 밝혔다. 그러자 돈을 대겠다는 곳이 없었다. 결국 깁슨은 3천만달러(약 3백6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를 위해 자기 재산을 털었다. 감독까지 직접 맡았다.

이런 논란과 함께 영화 대사가 라틴어와 이미 죽은 언어인 아람어(고대 시리아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셈족 계열 언어)로 돼 있어 흥행에 성공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영화의 뚜껑이 열린 지금, '예수의 수난'이 '대박'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급선회하고 있다. 오는 25일 미국 전역 개봉을 앞두고 여러차례 치러진 기독교인 대상 시사회에서 신자들이 몰아지경에 빠져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 등이 빚어졌고, 성당 및 교회를 중심으로 '2000년대 최고의 복음영화'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아예 극장을 통째로 빌리겠다, 수십만장의 표를 구입해 주변에 돌리겠다는 등 벌써 열기가 뜨겁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 같은 영화가 기독교 단체의 반발에 부닥쳐 일부 극장에서 간판을 내려야 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깁슨이 마리아역을 맡은 유대계 루마니아 출신 여배우(마이아 모겐스턴)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대인을 자극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을 최종 편집에서 삭제한 것도 도움이 됐다. 영화를 본 한 유대인 학자는 "멜 깁슨이나 영화 자체가 반유대교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반유대교적인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정도로 비판의 강도를 낮추었다. 유대인들은 중동 사태로 이스라엘 및 유대교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랍 및 아시아 지역의 비기독교인들에게 이 영화가 미칠 수 있는 파장을 더 걱정하는 눈치다.

ABC와의 인터뷰에서 깁슨은 이 영화를 12년 전부터 구상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무렵 정신 수양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라는 성 바오로의 말에 따라 라틴어 미사를 고수하는 전통파 가톨릭 성당을 설립하는 등 신앙생활에 몰두했다"고 밝힌 그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엄청난 희생을 감내했는가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 처형의 잔혹함을 묘사하는데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 82%가 기독교 신자 (가톨릭 포함)인 미국의 지금 분위기는 일부 장면이 폭력적이어서 우리로 치면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인 'R' 등급을 받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단위와 교회 단위의 관람이 줄을 이을 듯한 태세다.

195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2세에 가족과 함께 호주로 건너간 깁슨은 22세에 출연한 '매드 맥스'(79년)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라 이후 할리우드에 스카우트됐다.

한편 이 영화를 수입한 폭스코리아는 오는 4월 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남 (재미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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