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텅 빈 채로 달리는 '철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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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전쟁으로 멈춰 섰던 경의선 열차가 11일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허리춤에서 끊겼던 대동맥이 56년 만에 다시 이어진 것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란 철도중단점의 표지판을 '철마는 달리고 있다'로 바꿔 달아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경의선 개통 다음날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11~13일 기관차에 매달린 10량의 컨테이너가 텅 빈 채 달리고 있는 것이다. 14일에도 열차에 실을 화물 수요는 없다고 한다. 운행 첫날 북측 판문역에 도로경계석을 내려놓은 다음, 개성공단에서 만든 신발 등을 싣고 온 게 운송량의 전부다. 정부 당국은 "어렵사리 남북이 합의한 사항인데 처음부터 결행할 수는 없다"며 "빈 차로라도 운행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일시적 현상이란 해명에도 일리는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개성공단 입주 업체들이 이미 트럭 운송 계약을 해 둔 상태여서 당장은 열차운송 물량이 없다"며 "다음주부터는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낙관만 하기는 힘들다. 올 들어 11월 말까지 10만7891t의 건설자재.원자재가 남에서 개성공단으로 올라갔지만 거기서 상품으로 만들어져 내려온 물량은 10분의 1인 1만7337t에 불과하다. 그래서 화주(貨主)들이 열차편으로 관심을 돌려도 막상 싣고 내려올 짐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부가 가시적 성과를 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화물 수요 예측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달 남북 총리회담에서 경의선 개통 날짜를 12월 11일로 발표할 때부터 대통령 선거일(19일)을 염두에 둔 택일이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취임 1주년과 겹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믿고 싶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7일 남측인사 200여 명이 금강산에 올라가 치른 이산가족면회소 남북사무소 준공식이다. 이날 완공된 것은 남북 실무진이 입주할 사무실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핵심 시설인 면회소 자체는 내년 상반기에 준공될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역시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이벤트성 행사로 보는 시각이 있다.

10.4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교류.협력사업이 활발해지고 각종 회담에서 많은 합의사항이 나오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는 성과를 과시하기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쏟는 게 어떨까. 경의선 운행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7년간 공을 들인 사업이다. '화물' 없는 '화물열차' 운행으로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비판을 듣는 현실이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