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더 죽이는 선택형 수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6면

"과학과목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지금도 일부 과학과목은 의대 진학을 바라는 학생들 위주로 진행 중입니다." 서울 태릉고 유성철(물리) 교사는 2005학년도부터 대폭 바뀌는 수능의 파급효과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회전반에 불고 있는 이공계 살리기가 정작 토양이나 다름없는 대학입시는 물론 일선 교육현장에서 외면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교사는 "인문.사회계 출신이라도 과학적인 소양은 필수인데 올 대학입시에서는 전인교육이 퇴색하고 학생들을 눈치나 보는 기회주의자로 만드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고 토로했다.

올해 대학입시의 과학과목은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을 각각 Ⅰ.Ⅱ로 나눠 모두 8과목이다. 이 가운데 지원하는 대학별로 2~4과목을 고르는 만큼 학생으로선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 사실이다.

'선택형 수능'은 수험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심층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대학별로 요구하는 과목이 너무 다양해 8과목 중에서 어떤 과목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수험생들은 벌써부터 유리한 선택과목이 무엇일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김영일 교육컨설팅 소장은 "과학과목 선택을 어떻게 해야 유리한가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듣는다"며 "어느 과목에 사람이 몰리고 난이도가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정답이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과목을 선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수험생이 많다고 김소장은 덧붙였다.

지난해 수능까지만 해도 인문.사회계를 지망하는 수험생의 경우 과학Ⅰ 수준으로 이뤄진 과학탐구 시험을 치러야했지만 올해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자연계 진학을 꿈꾸지 않는학생들은 내신성적에 들어가는 과학 수업시간에도 다른 수능과목 공부에 열심이다. 내신에 과학점수를 요구하는 대학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과학은 인문.사회계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라는 것이 현직 과학교사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학생들이 특정 과학과목을 공부하고 싶어도 가르칠 교사가 없어 강요된 선택이 다반사인 경우가 현실이라는 것. 현 정부가 주요 시책으로 삼고 있는 과학기술중심사회 구축과도 한참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선택형 수능의 예상가능한 허점은 난이도 조절을 위해 표준점수와 같은 상대 평가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표준점수는 특정 응시영역에서 해당 수험생의 상대적인 성취 수준을 나타내기 위한 점수. 난이도가 어려운 과목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의 표준점수는 난이도가 쉬운 과목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보다 높게 매겨진다.

따라서 자연계를 지망하는 수험생의 경우 하위권 학생들이 몰리는 쉬운 과목을 선택해야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일반화돼 과목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과학Ⅰ에 비해 다소 어려운 과학Ⅱ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12월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수험생들은 화학Ⅰ(91.2%)을 가장 많이 선택했고 생물Ⅰ(86.8%), 물리Ⅰ(76.1%), 지구과학Ⅰ(61.3%) 순이었다. 나머지 과학Ⅱ 과목은 화학(7.6%), 생물(5.8%), 물리(3.9%), 지구과학(2.3%) 등 한자리 수에 그쳤다.

게다가 실제 수능시험에서 과학Ⅰ이나 과학Ⅱ 과목에 모두 30분의 시간이 동일하게 주어져 Ⅱ과목에 대한 기피는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Ⅱ과목에 가산점이 주어지지 않는 한 불리한 과목을 애써 선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과학탐구과목 최다 수강생을 확보해 스타강사의 위치에 오른 뒤 최근 무료 인터넷 강의를 선언한 ㈜사이버랩 에듀케이션 이범 대표이사는 "고교 과학의 핵심은 Ⅱ 과목인데 파행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걱정"이라며 "이공계생의 기초지식 부족은 10년 뒤 연구 및 산업현장에서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기술부 구본제 기초인력국장은 "이공계 학생을 선발하는 데 대학의 자율권을 보다 확대해야 한다"며 "대부분의 수험생이 수업을 통해 과학의 기초소양을 닦고, 과학과 수학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 위주로 이공계 대학생을 선발해야 이공계 살리기를 앞당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