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 관가 '서바이벌 게임'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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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교통부 수자원기획관실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경부운하 때문이다. 건교부는 지난 6월 한나라당 후보 경선을 앞두고 산하 연구원을 동원해 경부운하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다음 주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정반대 논리를 펼쳐야 하는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건교부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면 경부운하가 타당성이 있는 쪽으로 재조사를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지난달 6일 뉴라이트 계열의 5개 시민단체가 차기 정부 10대 개혁과제를 발표했다. 한나라당과 이념 성향이 비슷한 단체들이다. 공무원들은 개혁 과제에 담긴 정부조직 개편안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제 부처 고위간부는 "요즘 공무원 치고 뉴라이트 쪽 정부개편안을 안 본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부처마다 대응 논리 만들기에 고심 중"이라고 전했다. 일부 부처는 물밑에서 태스크포스까지 구성해 놓고 19일 선거가 끝나자마자 공식화한다는 방침이다.

대통령 선거가 막판에 접어들면서 과천 관가는 변신이 한창이다. 우선 기존 정책 논리 비판에 열을 올리는 관료들이 부쩍 늘었다. 현 정부 코드에 맞춘 인사로 지목된 경우 서둘러 민간으로 나가거나 해외근무를 자청해 '경력 세탁'을 시도하고 있다. 권력 이동기에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직 방어 안간힘=강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은 13일 간부회의에서 "안면도가 뚫리면 해양부는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수만은 사수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제일 부드러운 각료'라는 강 장관답지 않은 거친 표현이 동원됐다. 여기에는 기름 유출 사고 수습에 대한 청와대의 질책도 작용했지만, 더 다급한 속사정이 숨어있다. 해양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림부와 통합이 거론돼왔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때문에 해양부는 '2012년 여수 엑스포' 유치에 이어 기름 유출 사고 수습에 부처의 사활을 걸고 있다. 반면 농림부는 느긋한 입장이다. 지지율 선두인 이명박 후보가 농림부를 농식품부로 확대 개편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도 신경전이 치열하다.

예산처는 뉴라이트 계열이 제시한 정부개편안에 고무돼 있다. 재경부의 국고담당과 경제정책 업무를 떼내 예산처와 합쳐 국가전략기획원을 신설하자는 내용이다. 재경부는 금감위와 통합해 재무부로 위상이 내려앉는다. 이렇게 되면 국가전략기획원 수장이 부총리급이 될 공산이 커 재경부가 반발하고 있다.

◆'줄대기'와 '경력 세탁'=1급 이상 고위 공무원들은 '줄대기'와 '눈도장 찍기'가 한창이다. 학맥.인맥을 총동원해 유력 후보 캠프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캠프 측은 "이미 사람이 너무 많아 사양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골적으로 기존 정책을 비판하는 고위 공무원도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현 정부가 치중해 온 균형발전.부동산.대기업 정책이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다.

관료들의 몸부림에는 현실적 계산도 깔려 있다. 대선이 끝나면 내년 4월 총선거가 이어져 차기 정부 첫 내각에는 정치인 출신이 거의 입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전문관료의 입지가 넓어진다는 이야기다.

거꾸로 코드 정책을 밀어붙인 실무자들은 미리 짐을 싸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자실 대못질'을 주도한 국정홍보처 방선규 홍보협력단장은 워싱턴 한국대사관 공보참사관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누더기 부동산 정책'을 담당했던 실무자들도 지난해 말부터 민간으로 나가거나 해외 파견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동안 '경력 세탁'을 하면서 차기 정부 초기의 인사 태풍은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다.

정경민.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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