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대선 후보와 뽕나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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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러시아 농부 파홈이 바시키르 지방에 갔다. 1000루블만 내면 원하는 만큼 땅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해 뜰 때 출발해서 해 지기 전까지 돌아오면 그 사이 땅은 모두 내 차지였다. 다음날 파홈은 길을 떠났다. 비옥한 초원은 끝이 없었고 “조금만 더”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놀란 그는 출발점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기 직전 그의 손이 출발점에 닿았다. 촌장이 축하했다. “정말 좋은 땅을 갖게 됐군요.”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땅을 파고 그를 묻었다. 파홈은 그가 누울 만큼의 땅을 갖게 된 것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인간에게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의 줄거리인데 유력한 대선 주자가, 살고 있는 집을 뺀 나머지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겠다고 나선 때라 새삼 새롭다. 수백억대 재산 대부분이 부동산이고 애써 모았을 그것들이 돌부리가 돼 목표를 코앞에 둔 그를 자빠뜨릴 뻔했던 탓이다. 그 말고도 필요 이상의 땅에 발목 빠진 주인들을 숱하게 봐 온 우리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과연 얼마의 땅이 필요할까. 일찍이 제갈량이 천명한 바 있다. 임종을 앞두고 후주(後主) 유선에게 올린 표에서다. “성도에 뽕나무 800그루, 메마른 땅 열다섯 이랑이 있어 가족의 생활은 충분합니다.” 당나라 때 권력자가 경계해야 할 바를 모은 책 『대당신어(大唐新語)』에도 비슷한 예가 나온다. 이습예라는 관리가 자식들에게 일렀다. “내 비록 가난하나 나라에서 하사한 밭 열 이랑이 있어 밥은 먹을 수 있고 하남에 뽕나무 1000그루를 심어둔 게 있어 옷은 입을 수 있고 책 1만 권을 베껴 두어 넉넉히 벼슬 자리를 구할 만하니, 이 세 가지에 근면하다면 무엇을 달리 구할 것인가.” 뽕나무가 얼마만 한 재산 가치를 가졌는지는 다산 정약용이 설명해 준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다. “뽕나무 365그루를 심으면 해마다 365꿰미의 동전을 얻는다. 하루 한 꿰미로 식량을 마련하면 죽을 때까지 궁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뽕나무일까. 다산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살림 꾀할 방법을 밤낮으로 생각해도 뽕나무보다 좋은 게 없으니 이제야 제갈량의 지혜를 알겠다. (…) 뽕나무를 심는 것은 선비의 명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큰 장사꾼의 이익에 해당되니 천하에 이런 일이 또 있겠느냐.”

 역사에 귀한 이름 남긴 옛 선비들은 지나친 욕심을 삼갔을 뿐 아니라 하찮은 재물을 구할 때조차 털끝만큼의 구차함까지 경계했던 것이다. 우리의 유력 대선 주자는 얼마 전까지 큰 장사꾼이었다. 장사꾼으로서 타고난 재주를 계속 발휘했다면 그의 재산은 지금 수백억이 아니라 수천억이 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 더 큰 이름을 남기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그렇다면 많은 재산은 그에게 분명 짐이 될 터였다. 넘치는 재물은 장사꾼이라면 몰라도 선비한테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빌딩 임대료를 해마다 올리는 대통령을 국민이 보고 싶어 하겠나 이 말이다.

제갈량은 황제에게 고했다. “신이 출정할 때 조달이 필요 없고 필요한 의식(衣食)은 모두 관에서 지급하니 따로 재산을 만들어 이익을 얻고자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무사무욕(無私無慾)에서 제갈량의 혜안과 냉철한 판단이 나올 수 있었다. 사사롭지 않아야 공정할 수 있고 공정해야 사리(事理)에 밝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욕에서 자유로워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재산을 헌납한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는 길 나선 파홈과 다를 게 없다. 필요한 의식은 관에서 지급되니 따로 재산을 만들 까닭 없는 그가 무사한 정열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쏟는다면 그는 초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살 수 있게 될 터다. 하지만 재산 헌납이 그저 제스처였고 또 다른 욕심이 보태진다면 한 뼘 땅에 묻힌 파홈이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국민의 복덕(福德)과 불행도 거기에 달렸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