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배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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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02면

윤정희 데뷔 40주년 기념 특별전의 포스터.

어린 시절, 꿈이 뭐냐는 질문에 “대통령요” 했던 분이라면 나이가 꽤 드셨으리라 짐작해도 좋을 듯합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커서 뭘 하겠느냐 물으면 “선생님요” “공무원 좋아요” 같은 몹시 야무진 대답이 나온답니다. 조숙하다거나 애늙은이 같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시절의 신산함이 배어 있는 희망사항이랄까요.

순화동 편지

아이들 관심 밖으로 밀려난 대통령을 하겠다고 12명이나 줄줄이 나선 올 대선(大選)을 관전하다가 문득 신선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아카데미 시상식 장면인데요. 2000년 아카데미의 명예상인 ‘어빙 탈버그 상’을 받은 이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배우 워런 비티였는데 당시 63세이던 그는 로널드 레이건을 이어 배우 출신으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꽤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수상 소감에서 “탈버그 상과 백악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탈버그 상 쪽”이라고 말해 동료·후배 영화인의 환호를 받았죠. 기립박수 속에 환히 웃던 워런 비티의 얼굴은 참 근사했습니다.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빛나는 미소였어요.

바로 그해에 워런 비티에 견줄 만한 한국의 남자배우 신성일씨는 국회의원 강신성일로 거듭났죠. 두 사람은 1937년생 동갑내기이니 이제 일흔 살 늙은 남정네가 됐네요. 대통령보다 영화배우가 더 좋다 했던 워런 비티는 올해 영화연구소가 주는 평생공로상을 받았습니다. 영화판을 떠나 여의도로 간 신성일씨는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을 살고 나온 뒤 적적한 말년을 보냅니다.

520여 편 출연작에 거의 다 주인공으로 나왔던 한국 영화사의 간판 남자배우가 이렇듯 스타일을 구기고 만 까닭은 무엇일까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른바 ‘딴따라’에 대한 하대 풍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신성일 못지않게 60·70년대 한국 영화를 누볐던 여주인공 중의 한 명이 윤정희(63)씨죠. 남정임·문희씨와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훌쩍 프랑스로 날아가 권력자와 관련된 온갖 구설에 오르기도 했죠. 파리 3대학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받고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결혼한 뒤 지성파 배우로 거듭난 그는 올드 팬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늙지 않는 여자’로 남았습니다.

그 윤정희씨가 데뷔한 지 어언 40년이 됐답니다. 1967년 신성일씨와 출연한 ‘청춘극장’이 서울 관객 27만 명을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려 그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지요. 이를 기념하는 ‘윤정희 데뷔 40주년 특별전’이 22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특별전이 전국에서 모인 중년 팬이 앞장서서 마련한 자리라는 거죠.

“배우는 나이가 없다”고 말하는 윤정희씨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하는 팬들이 뭉쳐서 외부 도움이나 협찬 없이 꾸린 행사라 더 뜻 깊습니다.

신성일, 윤정희 두 분을 보며 ‘한국에서 배우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싶었습니다. 워런 비티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는 재능과 정열을 지닌 그들인데 말입니다. ‘청와대보다 충무로를 택하겠다’는 명대사를 날릴 미래의 배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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