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길 떠나는 시 ①

중앙일보

입력

-- 윤재철 시집 『능소화』 중에서

길 떠나는 사람이여 자존의 인간이여!

발길 닿는 대로 간다 할 때에도
늘 생각이 앞장서 갔다
너무나 오래 걸어 발이 부르터 터질 때도
발보다는 앞으로 남은 길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 지나온 길이 흔적 없음에
발은 조용히 눈을 뜨고
늙은 슬라브 노예의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래, 안다
이제는 돌아서 늦기 전에
집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발이
그 길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혼자 있을 때면
이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틈만 나면 구두를 벗고
두 발을 어루만지며
발과의 행복한 귀향을 꿈꾼다
-<발을 사랑하기로 했다> 전문

시인은 길 떠나는 자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늘 떠나는 것, 그것이 시인의 일상이자 곧 운명이다. 그래서 시인은 늘 부재하는 그 어떤 인물이다. 그 시인이 “이제는 돌아서 늦기 전에 집을 향해 가야 한다”고 말한다. 떠났으면 돌아오는 것은 인지상정! 그렇다면 시인은 어떻게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시인은 무엇보다 자신이 길 떠났던 방식을 반성한다. '발‘보다도 ’생각‘이 늘 앞섰다라고. 발보다 앞선 생각이 만들었던 길, 왜 문제일까?
시인은 자신의 길 이력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발길 닿는 대로 간다 할 때에도 / 늘 생각이 앞장서 갔다 / 너무나 오래 걸어 발이 부르터 터질 때도 / 발보다는 앞으로 남은 길을 생각했다”
머리는 판단하고 다리는 실행한다. 이성이 길을 만들면 육체는 그 길이 길임을 증언한다. 이성은 늘 앞서고 육체는 늘 복종한다. 이성은 전진하고 육체는 추인한다. 이성은 우선이고 육체는 최후이다. 이성은 깃발이고 육체는 바람이다. 시인이 여태껏 만들고 걸어왔던 길들은 바로 이 같은 이분법, 상하, 주종관계가 바탕이 된 길이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그 길을 끝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던 길이 “흔적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늘 생각이 앞장서” 간 길, 머리로 만든 길은 이제 없다. 시인이 이 대목에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발이야말로 이미 오래전부터 “길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머리의 명령을 보장 혹은 보완했던 발, 다른 식으로 말해보면 이성의 갑옷에 갇혀있던 발을 꺼내 두 손으로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어야만 한다는 각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발과 더불어 어디로 가야만 한다는 것일까? 시인은 그것을 “집을 향해 가”는 길, 곧 “귀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귀향”을 행복하다고 말한다. 모천으로의 회귀, 근원으로의 회귀인데 어찌 행복하지 않을까!
덧붙이자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후퇴하고 퇴각하는 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길을 완성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만 갔던 길을 이제는 몸이 이끈다. 마음은 몸을 아프게도 이끌었지만, 몸은 결코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그 길은 우리가 걸을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그러니 천천히 느긋하게 가자. 때로는 꽃구경도 하면서. 비록 그 길 끝에는 우리네 삶을 완성하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오전 수업 끝내고
오른손 중지 볼록 솟은 군살에
허옇게 묻은 백묵 가루 힘주어 닦고
혼자서 구내식당 가는 길
장마 얼마 앞두고
소담스럽게 핀 수국꽃에도 눈길 한번 주며
터덜터덜 구내식당 가는 길
뒤좇아 온 같은 부서 여선생님 둘이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혼자 가느냐
치사하다 농담을 한다
그러자 대뜸 내 입에서 나온 말
그러면 죽을 때도 같이 죽을 거야 하니
깔깔 웃으며 함께 밥을 먹지만
끝내는 같이 갈 수 없는 길
아무도 몰래 예비된 것처럼
어느 날은 문득 우수수 낙엽 지고
종내는 혼자 가야 하는 길
-<식당 가는 길> 전문

위 시에 등장하는 길은 두 개의 길이다. 함께 가는 길과 혼자 가는 길이 바로 그것. 함께 가는 길은 밥을 먹으러 가는 길, 혼자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다. 함께 가는 길은 꽃핀 길이며 혼자 가는 길은 낙엽 진 길이다. 함께 가는 길은 시간이 정해진 길이며 혼자 가는 길은 아무도 모르는 시간의 길이다. 그렇게 길은 둘로 나뉘어있고, 그 두 길의 모양새는 현저하게 다르다. 앞길로 가고 싶지만 우리는 반드시 뒷길을 거쳐야만 한다. 삶을 고집하고 싶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결코 없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비극이고 알고 있음에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비극이다. 종교가 그 비극에 조금은 위안이 될까?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했다지만

살며 사랑하며 괴로워하며
우리는 언제 한번 제대로
자존심 내세우며 산 적이 있었던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병이 찾아오고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손써 볼 수 없을 때

그냥 내버려 둬
혼자 죽게 좀 내버려 둬 말을 한다

사랑하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로 길 떠나야 할 때 비로소
참으로 쓸쓸한 자존심 하나
자존심 하나 지팡이처럼 앞세우고 간다
-<자존심> 전문

삶은 타인들과 함께 누리는 것. 따라서 타인들과 어울리며 적당히 둥글게 살아야 하는 것. 그러나 죽음에는 삶의 그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죽음은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과 관련해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우리들은 바로 이 혼자만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존심을 내세운다는 사실이다.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손써 볼 수 없어” “홀로 길 떠나야 할 때” “참으로 쓸쓸한 자존심 하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뒤늦은 자존심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태어나자마자 /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던 석가와 “살며 사랑하며 괴로워하며” “언제 한번 제대로 / 자존심 내세”운 적 없는 우리를 비교해 석가의 길을 쫓으라는 것일까?
그 해답은 ‘자존’에 있다. 또한 그것은 종교의 길이 아니라 인간의 길이기도 하다.

시인은 떠났다가 되돌아온다. 삶을 만들려고 떠났다가 삶을 완성하려 되돌아오는 것이다. 머리로만 찾고 만들었던 길은 이제 가뭇없고, 몸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 몸과 마음이 함께 행복한 길, 곧 근원으로 가는 길이 바로 그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길, 근원으로 이르는 길의 궁극에는 죽음, 곧 삶의 완성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길은, 반드시, 우리 모두 각자의 발로 홀로 걸어야만 하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걷게 되는 모든 길이다. 두렵다! 그 두려움에 시인은 참으로 인간적인 자존심으로 맞설 것을 요구한다. 자존, 스스로 있다는 것 혹은 스스로를 찾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길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찾고자할 때 모든 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떠나야 할 길과 돌아와야 할 길, 함께 가는 길과 홀로 떠나는 길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완성하는 길 위에 서있는 길목의 이정표들일 뿐이다.
그러니 자아를 찾는 자는 마땅히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돌아와야 할 때 망설이지 말 것이며, 함께 간다고 휩쓸리지 말고 홀로 가야할 때 당당해지라는 것이다. 길 떠나는 사람이여 자존의 인간이여!

글 김용필 북리뷰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