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202.全씨의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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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당시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은 친인척을 거쳐 자신에게로 죄어오는 검찰의 칼을 처음에는 「호통」정도로 물리칠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낙향」을 권하던 6共의 메신저 이원조(李源祚)씨를 호통쳐 물리친 全전대통령은 먼저 5共 청산의 주무인 최병렬(崔秉烈)청와대정무수석을 불렀다.崔수석은 『정신없이 혼났다』고 했지만 별효과는 없었다.얼마뒤 全전대통령은 崔수석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6共의 실세 박철언(朴哲彦)정책보좌관을 함께 불러 다시 불호령을 내렸으나 역시 별 효과는 없었던 듯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최후통첩과도 같은 호통을 친 것은 친인척 무더기 구속이 시작된 11월8일.全전대통령은 이날 골프약속이 있어 일찍 연희동집을 비웠다.당시 집은 석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사위 윤상현(尹相炫)씨가 유학을 보류한 채 지키고 있었다.맏아들 재국(宰國)씨는 당시 미국에 유학중이었는데 집안이 어려워지자 본인은 귀국하고자 했으나 全전대통령이 『들어오지마라.너도 지금 들어오면 잡혀간다』고 막아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둘째 아들 재용(在庸)씨 역시 뉴욕 에서 화가 수업을 받고있었다.막내 아들 재만(宰滿)군은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의 어린나이였다.
오전 늦은 시간 5共의 강경파 허문도(許文道)前통일원장관이 편지를 들고 연희동에 나타났다.5共 당시부터 『노태우는 배신한다』며 후계 지명에 반대했던 許전장관은 일찍 위기감을 감지하고나름대로 6共 권부 사람들을 만나 사태 진전 상 황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다.그는 계속 『이미 다 잡아넣기로 돼있다.굴복해선 안된다.정면돌파해야 한다』는등 강경 주장을 하던 터였다.그는 사위 尹씨에게 『급한 일이니 빨리 각하께 전하라』며 편지를건넸다.평소 그의 주장으로 미루어 친인척 무더기 구속 행진을 미리 파악해 보고하는 내용인 듯했다.
예비역 장성들을 위해 성남에 만든 남성대 골프장에서 마침 점심을 들고 있던 全전대통령은 편지를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그는 『당장 집으로 가자』며 일어선 뒤 귀가하는 차안에서 6共 핵심 4명을 호출할 것을 지시했다.청와대 의 崔수석.
朴보좌관 외에 민정당 박준병(朴俊炳)사무총장과 김윤환(金潤煥)원내총무였다.
핵심4인은 『오늘 저녁식사나 하러 연희동으로 오라』는 통보를받았다.이들은 서로 연락을 취한 뒤 연희동으로 가기에 앞서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만나 사전조율을 했다.
이미 崔수석이나 朴보좌관은 호출당한바 있기에 全전대통령의 반응을 예 상하고 대응방안을 논의한 것이다.그리고 언론의 눈길을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는 호텔에 둔 채 대기시켰던 다른 승용차를 함께 타고 연희동으로 갔다.
이날의 호통은 매우 높은 강도였다.全전대통령의 목소리는 시종격앙돼 있었다.全전대통령은 우선 『내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면서 두사람간의 40년지교를 설명했다.그리고는 『민정당을 만든게 누구냐.5共과 6共은 같은 뿌리인데 어떻게 단절되느냐』며 단절불가를 주장한 뒤 『최초의 평화적 정권이양을 하고 나간 나에게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6共도 다음 정권에 똑같이 당한다』며 경고했다.
全전대통령은 앞에 앉아있던 4명의 6共 핵심에게 말하고 있었지만(한 참석자의 기억처럼)사실상 호통 내용은 盧대통령을 겨냥한 것이었다.차마 현직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며 호통치기는 거북했던지 묘한 간접화법을 구사하는 것 같았다.
全■ 대통령은 막바지에 『너희들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너희들은 더이상 동지가 아니다』라고 의절(義絶)선언을 했으며『나는 법정에 설 각오도 돼있다』는 협박성(?)의지를 천명했다.「법정에 선다」는 말이 협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곧 「법 정에서 6共의 탄생신화인 6.29의 진상과 권력의 아킬레스 건(腱)인 정치자금문제까지 모두 폭로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5共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이 얘기를 들은 6共 핵심들은 혼비백산했다』고 한다.『이러다 무슨 일 생기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거꾸로 6共 권부를 급습했고 구속행진이 일시 중단됐다.
5,6共간의 갈등이 극점을 치닫던 순간 한쪽 당사자인 盧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풀기 시작한 사람은 실세중실세인 朴보좌관이었다.그는 11일 연희동을 찾아갔다.당시 朴보좌관 역시 이미 全전대통령의 신임을 상실한 상황 이었다.하지만사실상 盧대통령을 움직이는 朴보좌관인데다 최후통첩식 경고에 대한 盧대통령의 반응을 전하러 왔기에 면담을 허용한 것이다.
朴보좌관은 이자리에서「공멸은 피하자」는 전제하에 청와대의 요구 수용과 친인척 구속에 대한 양해를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속 보류됐던 나머지 친인척들이 다음날과 그 다음날 이틀에 걸쳐 예정대로 차례차례 구속됐다.
한고비 넘긴 듯했다.그러나 全전대통령은 곧 귀국할 盧대통령과의 담판을 위한 또다른 배수진을 쳤다.
연희동의 2차 공세는 독자선언(연희동은「양심선언」이라고 했지만 당시 정치권에서는「폭탄선언」으로 받아들였다)준비였다.이 부분에는 全전대통령의 사위 윤상현씨와 미국에 있던 장남 재국씨등가족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위 尹씨는 당시 연희동에 머물면서 외부 여론을 직접 전달하는 창구역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서는『저질 정치에 신물난다.차라리 진실을 다 밝혀라』는 권유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마침 장남 재국씨도 매부인 尹씨에게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가족모임에서 尹씨는『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업적은 어차피 훗날 평가될 것입니다.지금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이 썩은 정치판의 진실을 알게 해 정치판의 종기를 도려내는 일입니다』는 식으로 장인에게 독자선언을 진언했다.
그자리에 있었던 全전대통령 부부와 딸 부부는 모두 뜻을 같이했다.그리고 이순자(李順子)여사와 딸 효선(孝善)씨가 각각「국민에게 드리는 글」과「1盧3金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두가지 문안의 초안을 만들었다.
全전대통령이 6共 핵심 4 명을 불러 위협했던 6.29의 진실과 정치자금 내용까지 공개한 뒤 1盧3金등 정치지도자들에게「다같이 국민앞에 벌거벗고 서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가족들 뜻같이해 그리고 이같은 움직임을 사위 尹씨가 그날밤 5共 당시 청와대를 출입해 안면이 있던 조간신문 기자에게얘기했고,다음날 1면 톱기사로 보도됐다.
물론 5共의 양심선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5共 관계자 X씨는『全전대통령이 측근들을 불러 의견을 묻는 과정에서 6共과의 협상창구인 안현태(安賢泰)전경호실장과 이양우(李亮雨)전사정수석,그리고 장세동(張世東)전안기부장까지 반대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폭탄선언은「살상용」이 아니라 6共 청와대와의「협상용」,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해「협박용」카드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X씨는『全전대통령은 6共 역시 자신이 만든 정권이라고 생각했기에 파산을 원치 않았다』는 말로「협상용 카드 」라는 말에동의했다.간단히 말해 全전대통령은「공멸」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곧 귀국할 盧대통령과의 담판을 준비한 셈이다.
폭탄을 거머쥔 全전대통령이 이같이 배수진을 치고 기다리는 조국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盧대통령의 심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귀국 하루전 마지막 순방국인 브루나이에서 기자들과 만나 순방의 성과를 자랑하려던 盧대통령은 全전대통령 문제만 물어대는 기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그는『국내정치는 복잡해서 보고받기도 싫고…』라는가 하면『신문은 골치아파 안봤다』고 말하는등「골치」라는 말을 거푸 되풀이했다.마침내 그는『외교만 했으면 좋겠다』『우리 거꾸로 다시 한번 외국을 돌자』 는등 국내정치를 피하고 싶은 심경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착잡한 귀국행로 그렇다고 대통령이 국내정치를 피할 수도외국만 떠돌 수도 없는 일이었고,국내에서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던「골치」거리는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친인척들이 줄줄이 구속된데다 귀국하던 바로 그날인 14일 全전대통령이 큰아들같이 사랑하던 처 남 이창석(李昌錫)씨마저 검찰에 소환됐기 때문이었다.
全전대통령은 李씨만은 구속되지 않도록 盧대통령에게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에서 6共측에「이창석 구속여부만은 盧대통령 귀국후 결정해달라」고 요청해 놓고 있던 터였다.
당시 검찰을 지휘하던 청와대내 공식 사령탑 한영석(韓永錫)민정수석은『이창석씨 소환은 대통령 귀국후로 미루라』고 검찰에 얘기했다.그러나 검찰에서는『수사상 불가피하다.나중에 누가 책임지느냐』며 듣지 않았다.물론 수사상 불가피성도 있을 수 있으나 권력에 민감한 검찰이 청와대의 의견을 거부했다는 점은 의외다.
이에대해 한 검찰 관계자는『당시 검찰은 한영석수석의 통제하에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즉 당시 검찰은 오히려 6共실세 朴보좌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으며,朴보좌관이 李씨의연행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대통 령 귀국전 일단락」을 희망하는 청와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던 검찰이 권력 실세에 대한 충성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는 추론이다.어쨌든 이창석씨의 구속은 그나마 다독거려 놓았던 연희동의 감정을 또다시 폭발시켰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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