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영화 보일러 룸 베낀 듯" … 유령회사 만들어 주가 조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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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씨는 옵셔널벤처스 대표 시절 사무실 책상에 2000년 개봉한 미국 영화 '보일러 룸' DVD를 두고 수시로 봤다고 한다. 이 영화는 주가조작을 소재로 한 영화다.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 카지노를 운영해 큰돈을 번 세스 데이비스(지오바니 리비시 분)는 판사인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제이티 말린이라는 증권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그는 정상적인 주식 거래가 아니라 거액 투자가들의 돈을 유치한 뒤 유령회사 주식을 사고 팔아 돈을 챙기고 튀는 이른바 '보일러 룸'(주가조작 조직)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검찰은 김경준씨가 이 영화를 보고 주가조작 범죄를 계획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씨가 주가조작을 위해 만든 유령회사 '메드 패턴트 테크놀로지스'는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회사의 이름과 같다. 이 유령회사의 대표 이름은 지오바니 리비시. 보일러 룸의 주연 배우 이름과 같다. 김씨는 지오바니 리비시 이름의 여권을 위조하기도 했다.

수사팀 관계자는 "이 영화와 김경준씨의 증권조작 수법이 거의 같다. 영화에서 주가조작이 들통날 것에 대비해 사무실을 얻어놓고 이사를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옵셔널벤처스도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준씨는 또 여러 명의 외국인을 범죄에 동원한다.

LKe뱅크가 100억원을 받고 지분을 넘긴 계약을 한 AM파파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실존하는 생명과학 벤처회사다. 검찰 수사 결과 김씨는 AM파파스 투자담당 이사 래리 롱의 이름을 도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래리 롱은 김씨와 미국 와튼 스쿨 동기동창이다. 김씨는 그동안 검찰에서 래리 롱을 모른다고 진술해 왔다.

김씨는 그를 LKe뱅크의 대표이사로 등재했다. 래리 롱은 국제전화로 이뤄진 검찰 조사에서 "나는 LKe뱅크의 대표이사로 등재된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래리 롱은 김경준씨의 초청으로 2001년 2월 한국을 방문했다. 검찰은 김씨가 이때 래리 롱을 LKe뱅크의 주식을 인수한 투자자로 꾸미고 래리 롱 명의의 여권도 위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래리 롱을 이명박 후보의 측근 김백준씨에게 소개하며 'AM파파스 투자담당 이사'라고 된 명함을 건네게 했다.

김경준씨는 옵셔널벤처스코리아 대표로 등재된 스티브 발렌주엘라의 이름도 도용했다. 그는 원래 LA 소재 지역은행인 CDB에 근무하는 사람이다. 발렌주엘라도 2001년 2월 김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김씨의 부탁으로 옵셔널벤처스의 광은창투 인수계약서에 서명했다. 여권 명의도 김씨에게 도용당했다. 하지만 본인은 옵셔널벤처스의 대표로 등재된 사실을 몰랐다.

◆영화 보일러 룸(Boiler Room)=2000년 10월 개봉한 미국 영화. 벤 영거 감독, 지오바니 리비시 주연. 미국 증권가를 배경으로 내부자 거래, 허위 사실 유포, 유령회사 설립 같은 수법으로 주가를 조작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불법 이익을 챙기는 한 주식 브로커의 이야기를 그렸다. '보일러 룸'은 불법 주가조작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주식 브로커 조직을 지칭하는 미국 증권계의 은어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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