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비즈] ‘술 부자’의 술 맛 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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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국순당 배상면 회장(左)과 배중호 사장 부자가 자신들이 개발한 ‘백세주’와 ‘백세주 담’을 앞에 두고 전통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삼성동 국순당 사옥의 배상면(83) 회장 집무실에 작은 시음회 자리가 마련됐다. 장남인 배중호(54) 사장이 ‘백세주’와 ‘백세주 담’을 잔에 나란히 따랐다. 그가 정성을 쏟아 출시한 ‘백세주 담’ 신제품에 대해 부친의 평을 구하는 자리. 배 사장의 시선은 술맛을 본 아버지의 얼굴에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도 맛보셨지만 이번엔 어떠세요?”(배 사장)

“담백한데 조금 더 쓴맛을 가미했으면 좋을 것 같다. 쓴맛은 입맛을 돋우는데…, 그런 점을 좀 고려하면 어때?”(배 회장)

“백세주 맛에 익숙한 소비자를 감안하면 쓴맛을 너무 내세우면 무리인 듯싶은데.”(배 사장)

배 회장이 20여 년 전 개발한 백세주는 소주·맥주·막걸리·양주 정도로 품목이 단순하던 한국 술 시장에 전통주 바람을 불러일으킨 히트 상품이다. 달콤하면서도 신맛이 나는 우리 전통술의 맛을 살리면서 몸에 좋은 한약 성분을 가미해 웰빙 풍조를 업고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단맛은 여성들의 호응까지 얻었다. 하지만 입맛은 변해 버렸다. 2003년 1315억원에 이르던 백세주 매출은 지난해 800억원대로 떨어졌다.

배 사장은 “쓴맛을 선호하는 애주가들은 달아서 못 먹겠다는 반응이 많았다”며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 ‘백세주 담’을 내놨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백세주 담’은 백세주의 형제다. 백세주를 업그레이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맛을 내는 술이라는 것이다. 담백한 맛을 강조한 신제품을 내놓은 데는 매출 회복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

“와인메이커인 미셸 롤랑이 백세주를 테이스팅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세계화 가능성을 물었더니 ‘맛있기는 하지만 너무 달아 음식과 먹기에는 별로’라는 반응이더군요.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배 회장은 아들의 시도에 대해 “내가 백세주를 만들 때만 해도 애주가들이 단맛을 선호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혀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입맛 변화는 곧 전통주의 위기로 다가왔다. 와인 붐이 일례다. 하지만 이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다. 배 사장은 “음주 문화가 취하는 것에서 즐기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며 “엄청나게 많은 가짓수의 와인의 맛을 가려내는 미각이 발달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배 회장도 “우리나라 가양주도 수백 가지였지만 제조 전통이 끊기면서 대부분 사라졌다”면서 “잊혀진 전통주를 되살려 한국 대표 명주(名酒)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배 회장은 팔순을 넘긴 연령임에도 여전히 연구에 몰두한다. 요즘엔 술을 만들 때 젖산균과 효모가 공존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이 때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서울 양재동 연구실로 나간다. “균은 놀지 않거든. 그래서 만날 나가서 챙겨봐야 해.”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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