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작아도 삼성·소니 안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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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샤 미니 노트북을 시연해 보고 있는 여성(왼쪽), 위니아만도의 딤채가 전시된 레스토랑 ‘비스트로 디’.

이코노미스트 연말연시라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연말 특수를 노린 가전업체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대목에 한몫 두둑하게 챙겨둬야 내년 살림도 풍족한 법이다. 그러나 풍족한 계절에도 양극화 현상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다윗과 골리앗의 격차는 매년 벌어지고 있다.

이럴 때 김치냉장고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위니아만도와 미니노트북 시장의 강자인 고진샤의 성공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위니아만도는 영업이익률을 매년 높여가고 있으며 고진샤는 일본에서 11인치 이하 시장에서 1위를 했다.

그들의 성공전략은 무엇일까. 다윗이 처한 현실은 성경에 나온 것만큼이나 녹록지 않았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멀리서 돌팔매질을 하도록 시간을 주지 않고 특히 국내시장은 골리앗이 손을 뻗지 않고도 다 먹어치울 만큼 작다.

다윗이 이길 전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먼저 골리앗이 마구 휘둘러도 KO당하지 않아야 한다. 먼저 맷집을 키워야 기회가 온다. 맷집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쓸데없는 비용부터 줄여야 했다.

도요타 방식 벤치마킹하라

2003년은 위니아만도에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영국 헐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성공사례로 위니아만도의 딤채를 채택하는 등 겉으로는 잘나가는 듯 보였지만 시장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2002년 김치냉장고 가정보급률이 50%를 돌파했고 2003년부터 신규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5년 딤채를 출시한 이후로 한 번도 축소된 적 없는 김치냉장고 시장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쟁사가 끼워팔기를 통해 가격경쟁력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삼성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삼성·LG가 참 큰 회사더라. 하지만 우리가 다윗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기업이 격랑이라면 어떻게 그 격랑을 쪽배가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2004년 1월 삼성 미주법인 가전본부장 출신인 김일태 대표가 취임하면서 느낀 소회다. 그는 신규 수요가 줄기 시작하는 시장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얼마짜리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부가가치’를 팔 것인지 고민했다. 이를 위해선 전반적인 혁신이 필요했다.

▶위니아만도 김일태 사장

우선 그 결과부터 말하자면,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매출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영업이익은 4년 동안 260%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도요타방식(TPS)을 벤치마킹한 것이 효과를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 개 라인에서 여러 개 모델을 생산하는 혼류생산방식이 가능하게 된 것은 먼저 R&D파트에서 기본 섀시 수를 줄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김치냉장고는 싱크대 밖으로 툭 튀어나와 보기도 안 좋고 섀시 수도 많이 들어가 비용이 높았다. 이를 싱크대에 딱 맞는 크기로 맞추니 기본 섀시 수가 크게 감소했다. 김치냉장고의 골격이 되는 섀시를 정비하다보니 주요 모델 대당 재료비가 36% 절감되고 한 번에 여러 종류의 제품 생산도 가능해졌다.

물론 생산직 근로자의 공도 컸다. 김 사장은 “한 달에 20~30여 명의 생산직 관리원이 도요타의 협력업체에 연수를 갔다. 5시부터 11시까지 계속되는 힘든 연수과정을 직원들이 묵묵히 견뎌내 바로 성과로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R&D와 생산 일선에서의 혁신뿐 아니라 위니아만도는 마케팅에서도 효율성을 강조했다. 위니아만도가 쇼룸을 겸해 경영하는 레스토랑인 ‘비스트로 디’가 대표적인 예다. 신사동에 위치한 이 레스토랑에는 딤채가 곳곳에 놓여 있다. 연간 8만 명의 고객이 이곳을 찾아온다.

비스트로 디의 지배인이자 마케팅 팀장 김종우씨는 “한국에서 식당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연간 2억원의 손해를 본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팀장은 “한 번에 8만 명이 딤채를 직접 써보는 체험 이벤트를 할 공간이 어디 있겠느냐”며 “5억원 이상 드는 일을 우리는 2억원에 하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고객들은 딤채에서 직접 샐러드를 가져다 먹는 등 친숙하게 딤채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곳 주방장이 추천하는 메뉴 중 하나는 할리피뇨 파스타. 매운 고추인 할리피뇨가 입 안을 얼얼하게 하는데, 여기에는 뒷얘기가 있다.

주방장이 가난한 유학생 시절, 하숙집 아줌마와 함께 가장 싼값에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냥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스토리가 담긴 상품을 팔고 싶다”는 위니아만도 식구들의 바람이 메뉴 하나하나에 녹아 있다고 김 팀장은 설명했다.

이렇듯 ‘효율’을 강조하는 위니아만도의 문화는 지배구조와 관련 있다. 위니아만도의 전신은 1962년 설립된 만도기계다. 위니아만도는 99년 만도기계가 부도나면서 외국인 투자회사에 인수됐다. 현재 씨티그룹 벤처캐피털(CVC)이 대주주로 있다. 김일태 사장에게 사모펀드가 투자한 회사의 CEO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보통의 경우 메일을 보내면 하루 이틀 만에 회신이 옵니다. 그러나 CVC 사람들은 20~30분이면 답을 보내옵니다. 그것도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서요. 가끔 미국의 대학에서 전화가 걸려오기도 하는데, 투자자에 대해 서로 체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사장에 따르면 CVC는 결정이 빠르고 꼼꼼하다. 매년 5회가량 이사회가 열리지만 수시로 CEO와 주주가 미팅을 갖는다. CVC쪽에서, 혹은 김 사장이 먼저 청하기도 한다.

“가끔 아침이나 점심을 같이 먹죠. 전 보통 먹기 쉬운 음식을 먹으려고 합니다. 제가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투자자가 우리 시장에 대해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충분히 알려주고 불안한 부분에 대해 안심시키는 시간이라고 할까요?”

물론, 사모펀드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회사의 비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사모펀드가 대주주가 아닌 회사라고 해서 단기 실적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나 LG가 다양한 기능을 넣고 가격을 낮추는 정책을 쓰는 것이 오히려 위니아만도에 도움이 되는 일일 수도 있다. 가격을 낮추기보다 김치 저장 기술에 집중하는 위니아만도의 프리미엄 전략에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원인에 대해 “대기업의 가전 각 부문장은 자신들의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어 장기적인 것을 보기 힘든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위니아만도의 딤채는 삼성과 LG 제품보다 최대 약 100만원 비싼 가격에도 팔리고 있다.

역발상으로 고객 사로잡아라

▶고진샤 코리아 이호연 대표

딤채의 사례는 김치냉장고라는 블루오션의 발견에서 시작됐다. 1995년 딤채가 출시된 후 98년 삼성과 LG가 시장에 참여하기 전까지 김치냉장고의 성장은 곧 딤채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고진샤의 사례에서도 블루오션이란 말을 적용할 수 있을까.

10인치 이하 소형 노트북은 고진샤 이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고진샤가 후발주자임에도 “소형 노트북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했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기존의 10인치 이하의 노트북이 소위 UMPC (Ultra Mobile Person Computer)라고 불리고 있는데 반해, 고진샤는 이와는 다른 컨셉트의 노트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UMPC는 MS나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이 참여하면서 화제가 됐다. 작고 가벼워 휴대가 간편한 소형 노트북으로 고진샤가 추구하는 노트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고진샤의 노트북에는 쓰면서 크게 불편하지 않다고 느낄 만한 크기의 키보드가 장착돼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진샤 코리아의 이호연 대표는 “고진샤 제품 개발의 출발점은 모니터가 아니라 키보드였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노트북을 구입할 때를 떠올려보면 일반적으로 구매 기준이 모니터 사이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조업체가 모니터 사이즈별로 제품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진샤는 키보드를 쓸 수 있는 최소한의 사이즈를 고민하다 보니 7~10인치의 노트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일종의 역발상인 셈이다. 이는 노트북이 아무리 작아도 입력하고 편집하는 데 편해야 한다는 소비자의 니즈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제 제2의 PC시대가 열린다.” 고진샤의 오베 회장은 2006년 이전까지 다양한 사이즈의 노트북을 생산했다. 그러나 노트북 생산 후발주자로 소니, 후지쓰와 같은 강력한 브랜드와 경쟁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LCD 크기별, 스펙별로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던 트렌드를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기 때문이다. 틈새시장을 찾기 위해 노트북 시장의 흐름을 낱낱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진샤 측은 최근 노트북 시장이 강력한 성능에만 지나치게 치우쳤다고 판단했다.

“이동 중에 자신의 업무 효율을 높이고 오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고진샤의 오베 회장은 결국 2006년 이후, 10인치 이상 노트북 생산을 모두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크기만 작아진 게 아니다. 기능도 소비자 요구에 맞게 줄일 것은 줄였다. 티코에 벤츠 엔진을 달 수는 없기 때문이다.

“IT 대기업의 로드맵에 따라 높은 사양을 추구하게 되면 제조사도, 소비자도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소비자가 필요한 만큼의 스펙을 찾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저희는 PC CPU가 아니라 산업용 CPU를 쓰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윈도가 잘 돌아가는 것, 또 키보드로 편하게 입력 편집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0인치 이하 노트북 시장에서 고진샤가 대기업의 틈바구니 속에서 2006년 1위를 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고진샤의 성적은 어떨까. 삼성 Q1모델이 현재 판매량에서는 앞서고 있다. 그러나 고진샤 코리아는 한국 소비자 입맛에 꼭 맞는 제품을 만들면 전세는 역전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EMS 생산방식은…

EMS(Electronic Manufacturing Service)와 ODM(Original Design Manufacturing)은 다른 개념이다. EMS는 기업이 부품조달과 조립 등의 부문을 분사시키거나 외주화한다. EMS를 도입하면, 본사는 고부가가치 영역인 연구개발과 마케팅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EMS 전문업체들은 생산라인에서 유사한 성격의 다양한 제품을 제조할 수 있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유사한 부품을 대량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원가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EMS와 ODM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적재산권을 ODM에서는 제조사가 아닌 주문자가 가진다는 것이다.

고진샤 코리아의 비즈니스 모델은 기존 노트북 제조업체와 차이가 있다. 우선 고진샤 코리아는 고진샤 재팬의 지사가 아니다. 고진샤 코리아는 고진샤 재팬과 대만의 인벤텍 사의 자본제휴로 설립됐다. 인벤텍은 작년에만 10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한 대만의 EMS 대기업으로 HP, 애플, 도시바 등 글로벌 기업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국내 미니 노트북 시장에 “일본의 기술력과 한국의 기획력, 대만의 생산력을 갖춘 비즈니스 모델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배경을 설명했다.

고진샤 코리아는 매출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잡지 않으려 한다. AS 역량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고진샤 코리아는 피아노 페인팅 기법으로 광택을 입힌 노트북을 출시했다. 그런데 제품 100대가 얼룩져 있는 것을 발견해 사장을 포함한 전 직원이 매달려 자동차 광택기계로 밤새 다시 광을 냈던 에피소드도 있다.

현재 고진샤 코리아 노트북의 일부 모델은 이미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대표가 제안한 비즈니스 모델은 일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고진샤 코리아에 따르면 얼마 후면 한국형 제품이라 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 기능을 탑재한 모델을 곧 다른 나라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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