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크레머.아르헤리치 듀오 연주회를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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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아르헤리치가 북을 치면 크레머는 노를 저었다.때로는 순풍에 돛단듯,때로는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우여곡절이 많은 항해였지만청중들은 무사히 감동의 항구에 도달했다.
8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열린 크레머-아르헤리치 듀오 연주회는 두명의 독주자가 벌이는 불꽃튀기는 경연(競演)무대였다.시종일관 아르헤리치가 무대를 압도해버려 조련사 크레머는 야생마 아르헤리치를 길들이느라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슈 만의 바이올린소나타 제2번을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피아노의 음향에 짓눌려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청중들의 시선도 온통 아르헤리치의 양손에 쏠렸다.
그러나 여성적인 섬세함을 주무기로 한 크레머와 남성적이며 정열적인 아르헤리치의 「음악적 동거」는 쉽게 깨질 것 같지 않다. 만약 이 두사람의 음악세계가 뒤바뀌었다면 연주는 밋밋했을 것이다.전혀 다른 개성의 소유자가 만나 서로를 보완해주는 둘도없는 동반자였다.「마주보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말 그대로의 콤비였다.
마지막 곡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제2번 1악장이 끝나고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크레머는 피아노 현이 끊어진 것을 발견하고 연주를 중단했다.건반을 부수듯 쳐대는 아르헤리치의 힘을 스타인웨이도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아니면 성수대교처 럼 평소 악기 관리에 소홀했던 탓일까.결국 조율사가 무대에 등장했고 10여분 후에 연주는 1악장부터 다시 시작됐다.
크레머의 섬세함이 돋보인 것은 아르헤리치를 만났기 때문이다.
부부도 세월이 가면 닮아간다던가.두사람은 후반부에서는 신기하리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야생마가 크레머의 활에 길들여져 부드러운 여자가 돼 버린 걸까.반면 크레머도 마지막 곡 에서 차가운음색을 벗어던지고 후끈 달아올랐다.슈만에서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다면 프로코피예프에서는 화해와 절충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드보르자크 『4개의 로맨틱 소품』,프로코피예프 『5개의 멜로디』로 이어지면서 이 두 사람은 눈빛을 통해 체온을 주고 받았다. 특히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피날레는 음악적 교감의 황홀경에 도달하고 남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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