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태초에 여신 ‘가이아’가 있었으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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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여신들로 본 그리스 로마 신화
베티 본햄 라이스 지음,
김대웅 옮김,
두레,
520쪽, 1만2800원

남성의 역사(history)를 비튼 여성의 역사(herstory)는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과격한 여성운동에서 시작된 것 아니냐며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여성이 주인공인, 여성이 쓰는 역사가 주는 새로운 시각과 신선함을 부인하긴 힘들다.

그런 면에서 ‘여신’을 앞세운 이 책은 일단 시선을 붙드는 데 성공한다. 시인이자 35년 넘게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온 저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남성의 비중이 커 보인다는 점을 인정한다. 서구사회가 신화에서도 여성보다 남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고, 남성의 전쟁·모험을 중시한 ‘일리아드’나 ‘오디세이’가 강력한 위력을 떨쳐왔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남성 못지 않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 신화의 시작에는 가이아라는 대지의 여신이 있다. 생명과 풍요를 약속하는 이 여신이 있었기에 다른 신들도 탄생했다. 또 헤라는 질투와 고약한 성질로 유명하지만 결혼을 관장하고 인간사에 적극 관여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리스에서는 성가신 일이 생기면 “조심해! 헤라가 너를 잡으러 온 것 같아”라고 말한단다.

저자는 특히 여신과 여인을 다룬 60여 편의 이야기를 ‘용기를 지닌 여인들’ 같은 주제별로 묶는다. 사냥의 여신이자 당당한 독신주의자였던 아르테미스, 남자보다 빠른 최고의 달리기 선수였던 아탈란타를 ‘자유를 향한 질주’ 라는 주제 하에 소개하는 식이다. 아르테미스는 가부장제 신화의 중요 이데올로기인 순결과 정숙을 상징할 뿐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저자는 자유를 중시한 셈이다.

하지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독창적 해석을 기대했던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의미 부여보다 본래 있는 이야기 전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신이라는 화두는 제시했지만 분석이 부족한 책을 어떻게 즐기느냐는 독자의 몫일 듯하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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